[부활절예배설교] 주님과 동행
말씀 : 요20:19~21
제목 : 주님과 동행
1.매순간 부활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주일은 지난 주일만이 부활주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부활주일이고 다음 주일도 부활주일이고 매주일 아니 매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난 주일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가운데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이 매일 매순간 함께하며 힘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니까 이천여년전의 그때만 아니라 또 매년 돌아오는 부활절 뿐 아니라 우리는 매순간 부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주일 하루만 주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다. 와! 대단하시다. 이런 구호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 부활의 주님이 내 삶을 지배함으로 매일 매순간 부활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 그냥 그 옛날 이천여년전에 부활하신 주님으로 끝나버린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역사적 사실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성, 경험, 과학, 지식, 논리를 초월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세주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인정한 다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지금 나와함께 계신 부활의 주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그 은혜와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인정은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나팔은 불기 전까지는 나팔이 아니며,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걸 따라가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려면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하고 사랑하며 경배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이 온전히 내 심령속에 거하게 됨으로 자연히 부활의 주님의 그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충만하게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20:38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심령속에 모신 사람은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여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이시며 그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사람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함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는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내 심령의 왕좌에 모셔 들이고 그 주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늘 주님과 가까이 대화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통치자, 나의 주권자, 나의 인도자로 온전히 인정하고 그 부활의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저와 여러분은 진정 살아있는 자로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주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어떤 능력이 임하게 됩니까?
2.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면 우리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의 모든 어두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 즉 마귀 사탄, 어둠의 권세, 무덤의 권세,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에 보면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 있던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요20: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눅23:27절에 보겠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마27:56절이나 막15:40에 보면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그 모진 고문과 멸시천대와 채찍질을 당하시고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피를 흘리며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고통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27:61절에 보면 아리마대 부자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지내 드릴 때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3시였는데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 여섯시 장례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 세 시간동안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고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내려 무덤까지 모시고 가서 몸을 씻겨 드리고 향품을 바르는 등 모든 절차를 제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장례는 서둘러 대강대강 진행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던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 모진 고통과 멸시천대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만도 너무나 마음이 아픈데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다가 안식일이 끝난 첫새벽에 부랴부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의 무덤가를 찾은 마리아는 또다시 좌절감에 빠집니다. 어떻게 향품이라도 한번 발라드리려고 잠도 못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건만 이번에는 그마나 그 시신마져 없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그나마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하여 향품이라도 어떻게든 발라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시신마져 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슬픔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20: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랍오니’하고 대답합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오 주님, 주님 맞습니까? 오,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시네요. 이런 이런 정말 주님이시네요.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군요. 오 주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살아계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슬픔에 잠겨있었으니.. 오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의 슬픔은 단번 싹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61:3 상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이런 은총이 주어집니다.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십니다. 근심대신 찬송을 주십니다. 절망 대신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망권세, 어둠 권세 모두 이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도 남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혹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근심과 염려가 있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찾아오셔서 마리아야! 조목사야, 김장로야, 이권사야! 박집사야! 아무개야! 하면서 불러주십니다. 그러면 그 한마디면 끝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염려 슬픔 다 물러갑니다. 아무개야! 걱정말아라. 슬퍼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잖니? 내가 너를 도우마. 내가 네게 힘을 주마. 내가 너를 건져주마하시며 다가오셔서 우리로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절망속에 빠져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 모든 근심 걱정 슬픔 절말 한방에 싹 물리쳐 주신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갈 때에 그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다 이기고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1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와, 우리 선생님 대단하시다. 와, 우리가 이 굉장하신 분의 제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와, 이런 분이라면 우리가 목숨을 바쳐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했던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병정들에게 당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그들은 그만 겁에 질려 모두 도망가 버렸고, 죽어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고향으로 돌아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군중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니 도망가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저들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문을 잠겨져 있는데 예수님이 불쑥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무슨 말씀입니까? 왜 두려워 하느냐? 보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보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다시 살아났느니라. 나는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너희가 힘을 주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를 만져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려움과 절망 속에 꽁꽁 묶여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묶고 있던 두려움이 끈이 풀린 것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주님,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그토록 의지했던 주님을 잃고 실의와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찾아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고 좌절과 슬픔속에 빠져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을, 근심 대신 찬송을 주셨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실의와 좌절과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처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세상의 두려움과 약함과 핍박을 이기고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슬픔 두려움 절망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다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께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평강이 나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6:3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노라면 때로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대적자들의 도전으로 환난을 당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면 너희 또한 세상을 이길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약함과 추함과 죄와 어둠과 지옥과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전에 부활하셔서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부활의 주님과 늘 가까이서 교제하며 대화하며 의지하며 신뢰하며 믿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더럽고 추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이기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