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헌금기도 (봉헌기도)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를 특별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시고,
오늘도 거룩하고 복된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서 신령과 진정
 의 예배를 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빈손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말씀을 따라
 서 정성을 모아 예물을 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여기 우리의 힘과  정성과 뜻을 모아서 바친 예물을 열납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예물  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을 위해서 쓰고도 남음이 있는
오병이어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각양의 은혜와 은사를 더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우리들이 하는 사업을 도우셔서 날마다 번영하고 발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지위가 높아지며 수입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가 베풀 손길이 있
 음을 기억하여 탐된 나눔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들 가정에 근심 걱정이 없어지게 하여 주옵시고,
오로지 찬송의 메아리만 늘 울려 퍼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가정천국을 이루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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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사도의 질문

 

 

 

 사도의 질문 (로마서 3:27-31)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1. 내세우고 싶고 자랑 하고 싶을 때, 복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복음을 이해하면 결코 자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인 동시에 모든이의 하나님이 되신다.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그런즉 자랑할데가 어디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죄악 투성이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3. 믿음으로 받으라.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양팔 뻗어 받으라.

죄성때문에 우리는 무언가 행위를 해야 할 것 같은 교만으로 인하여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4.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낮춰라.

내가 죄인임을 하나님앞에서 인정하라.

자기를 세우려고하지 말라.

스스로 의롭다함을 여기지 말라.

 

5. 구원 얻음에 대해서는 내세울것, 자랑할 것은 없다.

감사와 찬미 밖에 없다.

 


6.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자랑하라.

우리는 그 피로 속죄함을 받았다.

 

7. 오직 하나님 한분만 유일한 신이다.

하나님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이의 하나님 되신다.

 

8.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계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없이 똑같이 주셨다.

하나님 한분, 한 길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9.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장 16절)


1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장 22절)


11. 율법을 주신분은 하나님.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분은 하나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선한것이다.

은혜와 율법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율법을 이루어 가신다.


12. 하나님의 지혜는 크고 깊고 넓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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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장학] 성장하는 교회의 특성

 

 

성장하는 교회의 특성

성장하는 교회는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보다 괄목할만하게 개발된 질적 특성들을 갖고 있는가?

♥ 교회 성장에 대한 오해

이 책에서는 성공한 교회를 모델로 모방한 것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 교회 성장을 원리 중심 접근 방식을 따라 교회 성장에 기초되는 보편적 원리들을 발견, 그 사례들을 분석하였다.

♥ 국제적인 연구 결과

어떻게 하면 모든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교회 성장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세상에 있는 많은 교회들을 과학적으로 올바르게 조사 ?연구해서 얻는 것이다. 세계 1,000개의 교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우리는 “오늘날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해 각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근거있는 해답을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 “성장”이 적합한 기준인가?

교회 성장 속도와 같은 양적 성장과 질적 지수로 나타내는 질적 성장으로 표현하여 네 가지 유형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①높은 질적 특성+양적 성장[질적 지수(QI)가 56이상(기준이 50)과 5년에 걸쳐 매년 10%이상 성장] ②높은 질적 특성+양적 감소 ③낮은 질적 특성+양적 감소 ④낮은 질적 특성+양적 성장

이러한 조사는 네 개의 유형에 속한 각 교회의 상태를 진단 가능케 한 최초의 조사 연구이다.

♥ 질적 특성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의 차이점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은 “사역자를 세우는” 일이다. 성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사역을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와 권한을 부여 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이런 지도자는 교회의 수많은 일들을 자신들이 다 하느라 시간을 뺏기는 대신, 그들의 시간을 제자훈련, 권한위임, 그리고 재생산에 투자한다. 이런 식으로 투자한 노력의 결과는 상상 할 수 없는 성장을 가져 온다.

♥ 질적 특성2: 은사 중심적 사역

“은사 중심적 사역”이라는 질적 특성은 특별히“하나님에 의한 자연적 성장”이 뜻하는 바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은 교인들이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은사를 따라 사역할 수 있도록 잘 조정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섬길 때, 인간의 힘으로 하는 부분은 줄어드는 대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뤄지는 일은 더 많아 지게 된다. 그러므로 은사에 따라 사역하게 되면 놀랍고 대단한 일을 해 낼 수 있게 된다. “은사 중심”과 “기쁨이 넘치는 삶”사이에 놀라운 연관성이 드러났다. 즉 “은사 중심적 사역”은 개인의 삶이나 교회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읽으면서 생각해 볼 때 이 이유는 아마도 은사 중심적으로 사역하면 만족감과 적극성과 성취감이 더해져서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 질적 특성3: 열정적 영성

“이 교회 성도들은 ‘불붙어’있는가? 성도 들이 기쁨과 열정으로 헌신과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성장하는 교회나 퇴보하는 교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우리는 이 질적 특성을 “열정적 영성”이라 부른다. 영적인 열성이라는 개념과 흔히 말하는 “의무를 다하여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고 율법주의 경향이 있는 교회는 영적 열심히 대게 평균 이하였음을 발견 했다.

기도 생활에서 열정적 영성의 결과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기도의 시간(양)보다는 “기도는 나에게 은혜로운 시간이다”라는 영감있는 경험이 교회의 높은 질적, 양적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경과를 접한 나는 기도를 시간만 채우려하는 기도에서 열성적인 은혜스럽다고 생각 할 만큼의 기도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질적 특성4: 기능적 조직

기능적 조직 이라는 질적 특성의 핵심이 사역의 계속적 증진을 촉진하는 조직 개발이다. ex)사역 각 분야에 부서장들이 있는 교회가 없는 교회보다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보여 주고 있다. 지도자는 단지 어떤 조직을 이끌 뿐 아니라, 또 다른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생조직이 이뤄질 때 까지 계속해서 교회 조직을 평가, 개선해 나가게 된다. 이 기준에 도달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들은 없애든지, 아니면 바꿔야 한다. 이와 같은 계속적이고도 조직적인 자동 갱신의 과정을 통해 전통주의적 타성들 중 많은 부분을 제거 할 수 있다. ex)전통에 얽매여 교회들이 얽매이지 않는 교회보다 질적으로 낮으면서 쇠퇴하고 있는 교회가 많았다.

이 부분에서는 튼튼한 조직을 갖추어야겠다고 생각되며 전통에 얽매이는게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질적 특성5: 영감 있는 예배

구도자 예배, 즉 주로 불신자를 겨냥한 예배는 질적 특성과 양적 특성에는 크게 기여 한다고는 볼 수 없는 결과들이 나왔다. 이런 결과들이 나왔다고 해서 “구도자 예배” 형식이 보통교회들이 모방 할 좋은 전도 방법은 못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전도 방법의 예배가 바로 교회 성장 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가 신자 중심이든 불신자 중심이든, 또 전통적 스타일이든지 자유스러운 분위기이든지 그것은 교회 성장과 무관한 것이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밝혀진 다른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과연 성도들에게 ‘영감 넘치는 예배’인가?”라는 점이다. ex)영감이 넘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교회는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하고 있는 교회였다. 여기서 “영감 있는”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의 근원인 인스피라티오(inspiratio)라는 단어의 뜻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영감,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 할 때 예배의 분위기는 물론 예배 절차에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영감 있는”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교회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게 된다.

이 부분의 내용을 읽으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 기쁘고 영감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혹은 목사를 위해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고 기쁘지도 않는 예배를 참고 있어주는 그들의 “충성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에 참석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까 반성해 본다.

예배가 영감 넘칠 때 사람들은 “스스로”예배에 출석 하게 된다.

♥ 질적 특성6: 전인적 소그룹

소그룹의 계속적 번식은 보편적 교회 성장 원리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질적 특성, 양적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려면 소그룹이 단순히 성경구절을 공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의 메시지를 매일의 삶에 적용시키는 전인적인 소그룹이 되어야만 한다. 소그룹 안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실제 처해있는 개인적인 문제나 질문들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전인적 소그룹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 섬기기를 배우는 자연스러운 장소가 되어야 한다. 소그룹은 또한 번식을 통하여 교회 성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낸다. ex)“의도적으로 소그룹을 나누는 것을 통해 소그룹 번식을 촉진 한다”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목사의 교회가 월등히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보여 주었다.

이 내용에서 소그룹의 운영과 소그룹의 번식이 교회 성장의 최대 요인임을 알 수 있었다.

♥ 질적 특성7: 필요 중심적 전도

모든 사람들이 다 전도자는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중 10%이하의 사람들에게만 전도의 은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 전도의 은사를 가졌는지 교회의 지도자가 알고 그들에게 맞는 사역을 맡긴다는 것은,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하는 교회가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 자기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불신자들을 섬기고, 그들이 확실한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그들이 가까운 교회와 연결되도록 돕고 격려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의무다. 교회 성장의 열쇠는 교회가 전도의 초점을 불신자들이 당면한 문제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맞추는데 있다.

여기서 나는 전도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이미 맺은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그가 필요함을 충족시켜 주는데서 전도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 질적 특성8: 사랑의 관계

성장하는 교회는 정체되어 있거나 쇠퇴하는 교회에 비해 눈에 띄게 높은 “사랑지수”를 갖고 있다. 이“사랑지수”를 정하기 위해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 이외에 교인들이 서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고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ex)자주 서로를 식사에 초대, 차 마시기를 하는지? 교회는 칭찬을 하는데 얼마나 너그러운가? 교회 목사는 자기 교회평신도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교회안에 얼마나 웃음이 있는가?

여기서 “웃음이 넘치는 교회 생활”과 교회의 질적 양적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우리 교회는 웃음이 넘친다”라고 대답한 교회들은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들이였다.

진실하고 실제적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석과도 같은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입으로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전도 프로그램에 비해 훨씬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얘기 하는 것을 듣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정말 어떻게 역사하는지 경험하기를 원한다.

우리 논공교회에서도 사랑의 실천에서 역사는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 어떤 질적 특성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질적, 양적 성장을 원하는 교회라면 이 여덟 가지 질적 특성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간과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흔히 “교회성장은 전적으로 기도에 달렸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소그룹예배도, 지도력이나 조직도, 그 어떤 다른 요인도 그것 하나가 교회 성장의 “유일한”열쇠는 아닌 것이다 “유일한”열쇠는 여덟 가지 요소들의 조화로운 상호 작용에 있다.

♥ “65 법칙”

교회 안에 질적 내용이 있으면 양적 성장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한 교회가 여덟 분야에서 모두 65의 질적 지수에 도달했다고 하면 교회가 성장할 통계적 확률은 99.4%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65의 질적 지수의 의미는 지도자의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교회 성장에 헌신된 교회, 거의 모든 교인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이 능력과 넘치는 열심을 갖고 믿음을 실천하는 교회, 교회성장에 기여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조직이 평가되는 교회, 한주동안 예배가 기다려지는 교회, 그리스도인 교제를 통한 사랑과 치유의 능력이 소그룹 안에서 경험되는 교회, 거의 모든 교인들이 자신의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루도록 돕는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거의 모든 활동에서 나타나는 교회. 저희 논공교회에서도 위의 세부적인 사항들이 다 적용되기를 소망합니다.

♥ 질적 접근

질적 접근은 사역 현실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지를 갔고 있다.“어떻게 하면 우리 예배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도, 우리는 “여덟 가지 질적 분야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장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서 고민해야 한다. 진정한 질적 특성, 양적 성장에 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성장의 외적 성장을 고민하기 보다 질적 성장을 고민 할 때 우리 논공교회도 외적 성장까지도 덤으로 얻게 됨을 믿어봅니다.

♥ 왜 양적 성장 목표는 부절적한가?

예배 참석자의 수 (양적 성장 목표)를 정해 놓지 않아도 조사에 의하면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 10개중 7개는 이런 양적 목표를 정하지 않고도 명백하게 성장하고 있다.

교회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도전을 주며, 시간제한이 있고, 측정할 수 있는 목표를 필요로 한다. 숫자를 정해놓고 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성장을 위해 구체적인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수적증가는 질적 지수가 향상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부산물이다.

우리 논공교회도 성장 목표를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맞춰서 목표를 세워야겠습니다.

♥ 큰 교회가 “좋은”교회인가?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 같다. 연구, 조사 과정 가운데서 어떻게 그와 같은 견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

1.성장·쇠퇴하는 교회들의 평균 등록 교인수와 출석교인수를 분석하고 비교해 보았을 때 등록 교인수는 쇠퇴하는 교회가 평균 2배 이상 많고, 출석 교인수는 쇠퇴하는 교회가 단지 17%만 높다(등록 교인수는 많은데 출석 교인수는 턱없이 적다.)

2.교회크기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큰 교회는 연성장 3%, 질적 지수48,작은 교회는 연성장13%, 질적 지수 52로 나왔다.(성장이든 질적 지수이든 작은 교회가 높았다)

3.부정적인 요인도 큰 교회크기가 세 번째를 부정적인 요인으로 판명되었다.(자유주의적 신학, 전통주의에 이어 세 번째)

4.새 신자 수 에서도 작은 교회가 큰 교회에 비해 늘었다.

5.새 신자를 얻는 비율이 통계적으로도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높게 나왔다.

6.질적 특성 면에서도 큰 교회 보다 작은 교회에서의 참여도가 두드러진다. 은사에 따라 일을 맡고 있는 것과(작은 교회31%, 큰 교회17%), 소그룹에 속해 있는 교인수(작은 교회46%, 큰 교회12%)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외가 있다.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보이는 큰 교회도 있지만 본보기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탄탄하게 성장할 뿐 아니라 혁신적인 수적 증가를 나타내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을 잘 연구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
 
8가지 질적 특성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어느 것 하나 등한시 할 것이 없음을 다시금 깨닫고 미래를 보고, 하나 같이 합심하여 질적 지수를 높이는데 전심으로 행하여야겠고, 자기의 믿음으로 자기 행할 바를 행할 때 양적 성장도 더불어 성장함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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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특강]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누구인가?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다” 또한 “절대 자를 향한 기도는 인간의 본능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기도를 응답하실 만한 주권과 능력을 가지신 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단지 명목뿐인 신에게 응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기도의 행위만을 드리는가?

이는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 450명의 대결에서 나타난다. 바알 선지자 450명이 바알 신에게 열렬히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어 당황해하는 자들 앞에서(왕상18;36-37)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 소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강렬한 불로 응답을 보여 주셨다.

(왕상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모든 백성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사건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뜻대로 확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성부이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하신다.

(요한복음 17;1)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성부이신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며,

그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는 기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13-14)에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며 성부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확실히 하고 있다.

(요한일서 1;3)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다음 중요한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연약한 인간인 우리의 기도가 열납 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우리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마태복음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우리가 죄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례미야 31;3)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무궁히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기도를 항상 받으시고 인도하여 주신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응답은 항상 기도자의 기대치를 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분은 믿음으로 기도 할 때 참 기쁨과 평강을 충만히 주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므로 성도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며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기도하는 영혼들을 채워 주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분은 진실한 마음으로 그를 찾을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만나주시고 신속히 응답해 주신다.

(시편 145;18-19)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이사야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우리의 기도소리에 신속히 응답하시기 위하여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에 용기를 내어서 기도하는 일에 힘써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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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종교입니다. 한국에서도 20%의 인구를 점유한 유력한 종교(불교, 유교와 더불어)입니다. 본 내용은 기독교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를 위한 글로써 전도를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기독교는 많은 분파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구분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방교회는 로마캐토릭(구교)과 개신교(신교)이며, 동방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시리아 정교회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로마캐토릭이 가장 광범위한 영역(유럽, 남아메리카)을 갖고 있고, 동방교회는 그리스, 러시아의 지역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개신교는 미국에서는 침례교,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 독일은 루터 교회, 네델란드는 개혁파의 분파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감리교, 구세군가 많은 분파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큰 분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분파의 총합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기독(基督)의 종교(宗敎)”라는 뜻입니다. 기독은 ‘그리스도’에 대한 중국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야소(耶蘇) 기독(基督)’으로 번역되었고, ‘야소’는 ‘예수’로 바뀌었지만 ‘기독’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야소교(耶蘇敎)”로 소개되었다가 점차 ‘기독교’로 통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야소교’는 ‘예수교’입니다.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일한 종교인데 한국의 통상어가 ‘기독교’가 되었고, 영어도 ‘Christianity’로 됩니다. 한국 장로교의 역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Religion of Christ)” 혹은 예수의 종교(Religion of Jesus)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진 분파의 총칭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다를 때에는 이단이 됩니다. 다양한 분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대한 강조와 적용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임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 순간 기독교가 되지 못합니다.

 

1. 인간에게 주어진 종교의 필연성

 

인간은 동물과 다른 많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언어, 유머, 창조성 등 그중에서도 ‘종교’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칼빈은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거 종교성을 제시했습니다. 종교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습니다. 무종교도 종교의 일환이며, 무신론자도 신개념을 전제함으로 종교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21세기 최첨단 과학 시대에 종교가 과학 아래로 서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종교가 세상을 결정합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비도 종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미신적인 제사 행위는 계속되며, 혹은 증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만연된 사회에 오히려 미신이 증가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 종교는 평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과 영생을 목표하는 종교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여러 종교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죄사함이 없는 상태, 영생의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는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칼 맑스는 종교를 아편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임시적으로 주어진 평안은 아편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죄사함)과 영생은 참 평안을 줍니다(요한 4:14).

 

2. 종교: 미신(거짓 믿음)과 복음(참된 믿음)

 

최첨단의 과학시대, 인터넷, 정보시대가 도래했는데 주변에는 점집이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궃, 당산제 등은 전통문화로 채색되어 우리의 주변을 범람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점이 성행하며 신비주의 종교가 범람합니다. 왜 사라져가던 미신 행위가 다시 우리 생활로 들어올까요? 미신은 불안을 증폭시키며 공포를 조장하고 제거하는 척하는, -병주고 약주는- 형태입니다. 불안이 증폭된 현 세대에서 쉬운 해결방법과 위로를 얻으려는 조급함이 미신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으로 불리는 것도 일종의 미신입니다. 즉 자기의 안녕과 유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주어지는 구원과 영생입니다.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팔 수 있으며,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익뿐만 아니라 생명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신과 신앙이 다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철학과도 구별됩니다. 철학은 사상의 총합으로 진리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진리는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철학은 불가지론, 허무주의로 귀결되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성찰할 수 있습니다.

 

3. 종교: 과학(가설과 불확실) VS 믿음(정직한 이성)

 

이 시대의 시금석은 ‘과학에 근거한 합리성’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는 “과학(科學)어떤 영역의 대상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계통적으로 연구하는 활동, 또는 그 성과의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 실험과 증명이 필요합니다. 실험과 증명으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매우 적은 사항에 대해서만 증명되었지 실험에 의해서 증명된 사항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기본 단위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원주률(π)도 ‘3.14’라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지구의 중력(g)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오차를 인정합니다. 과학은 진리와 양심의 시금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첨단의 과학 시대로 정평된 지금에 오히려 윤리가 강조되며, IQ에 부가되어, EQ. SQ(Social, Spirit) 등 다양한 지수들이 등장합니다. 과학과 윤리는 인간의 고안물로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가 명확하게 인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 센 인간은 한계에 대해서 절대로 인정도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진리를 증명하는 체계입니다. 과학은 시대가 변하면서 바뀌고 바뀔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 없습니다.

 

4. 기독교 복음(福音)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시작입니다(마가 1:1). 보통 복음을 “좋은 소식, 기쁜 소식(good news)”라고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에 대한 소식을 복음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과 사역으로 이해(Sola Christus)해야 합니다.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세워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7). 복음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대한 선포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인격과 지상의 공생애 3년의 사역, 승천과 통치입니다. 복음은 인간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인간 방법과 언어로 제시되었다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죄사함의 신비를 믿어 새 생명의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복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5. 기독교의 신(神) 명칭: ‘하나님’과 ‘하느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 명칭이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라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신(神)’과 동일합니다. 초기 한국 선교에서는 하나님을 ‘천부(天父)’, ‘상제(上帝)’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어에서는 ‘God’와 ‘god’로 구별하지만, 독일어에서는 ‘Gott’와 ‘Gott’로 동일합니다. 한국에서는 ‘신(神)’으로 ‘하느님’으로 부르지만, 기독교 교회에서만큼은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느님’으로 전환하였고, 기독교 진보 진영에서 ‘하느님’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아름다운 일 중 하나는 독자적인 신명(神名)을 창출한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자신의 신의 이름을 창출한 종교가 없고 기존에서 사용한 신의 이름을 부과했습니다. 아랍권에서 기독교 진영에서 ‘알라’라는 신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주장한다고 합니다. God, Gott, 알라까지도 자신의 신(神) 개념을 만들지 못했지만(인도네시아는 자국어로 성경을 편찬하지 못하도록 금지),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하여 기존의 신, 토속신과 다른 유일하신 신(神)을 고백하는 고귀한 일을 하였습니다.

 

6.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

 

신(神) 존재에 대한 인정은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하게 인류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롬 1:19-20). 칼빈은 인류에게 있는 미신 숭배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제시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신(神)을 부정하려고 해도 인류는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본래적으로 참 신(神)을 섬기는 것은 자연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죄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혹여 알수있다할지라도 거부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명확히 아는 것은 절대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정당한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인간의 죄된 본성

 

인간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완전한 상태로 평가한 종교, 혹은 철학 그리고 과학은 없습니다. 모든 종교, 윤리, 철학에서 인간은 항상 연약하며, 부족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인간 이해의 독특함은 “죄(罪)”로 규정하며, 생래적인 죄(원죄)로 이해합니다.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을 제시하는 종교나 철학은 없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가 100년 이상 전개되었지만, 결국 알 수 없음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 우울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해결을 제시합니다. 죄가 가리 울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자기 자신도 그리고 이웃 인간 그리고 피조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제시하는 죄의 해결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8. 인간의 본성의 회복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롬 3장) 규정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무한 가능성을 내재한 존재 혹은 하나님의 자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종교들은 명확히 문제를 지시하지도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롬 3:11, 롬3:23). 인간을 철저하게 부패한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진단에 대한 치료책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9:12, 막 2:17).

인간의 죄된 본성의 치료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속주로 이 땅에 오셔서 치료의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속주께서는 속죄 제물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치료(의의 수여의 근거 확립)하였습니다. 치료를 받은 사람(속죄의 믿음)은 건강한 삶을 영원한 통치자와 살게 됩니다(화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롬 10:13).

 

9.구속주 예수 그리스도

 

도입에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치료하여 회복시키는 의사(치료자)로서 구속주이십니다. 예수께서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셔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첫째, 치료의 방법으로 구속 사역을 하셨습니다. 아담의 죄악을 치료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은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속죄 제사로 이루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몸소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속죄 제사를 완성하셔, 누구든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믿는 자에게는 회복의 길(속죄=칭의)을 열었습니다. 이 속죄 제사는 구약 성경(특히 레위기)에 예표 되어 있습니다.

둘째, 치료의 방법은 믿음의 백성들을 다스리심으로 완전한 회복(성화=화해)을 성취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 후에 승천하신 주(主)께서 성령을 교회에 보내심으로 백성의 다스리심을 확정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백성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아, 주와 함께 연합하게 됩니다.

 

10.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하여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를 자기와 연합함으로 한 자신의 나라(그리스도의 왕국)를 창설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죽음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아버지의 노하심을 녹이셨는데,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피는 우리들의 죄의 영원한 속죄 행위이며 우리들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죄 씻는 정결의 수단입니다.

그의 순종은 우리들의 완전한 화해이라는 것이고, 그는 우리들의 기도가 그의 은혜로 인하여 가납(嘉納)되게 하는 유일한 도고이십니다. 그는 우리들을 보호 아래 감싸 주시는 신실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며, 우리들의 육신의 죄를 제어하여 의와 거룩한 것으로 우리를 다시 지으시고, 그 자신만이 우리 안에서 복된 삶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 헌사에서 발췌 -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죄사함

 

기독교는 죄사함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그리스도)입니다. 작금의 종교들은 죄사함이 아닌, 마음의 평화, 기쁨을 추구합니다. 종교의 목적이 마음의 평안과 위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마음의 평안과 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죄사함과 영생입니다. 기독교에 죄사함이 없는 마음의 평안은 위선입니다. 맑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평가했는데 타당성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아편을 취급하지 않고, 생명을 취급합니다. 맑스의 제자들이 아편을 제거하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인간 본성에 뿌리박힌 종교심은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인류의 종교는 마음의 평안을 추구함이 총합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사함을 통한 평안과 위로를 추구합니다.

이 죄사함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과 천상에 계신 예수님께서 마치 사도 바울을 부른 것처럼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12. 그리스도인의 삶(성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 즉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죄사함은 사람을 아는 지식을 정당하게 세울 수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성령으로 삽니다. 성령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삽니다.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의 은사로 자기의 소명을 이루어 갑니다. 죄사함은 동일하지만, 은사는 다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은사를 받았음으로 개발, 활용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의 삶입니다.

 

 

13. 기독교 - 그리스도인의 모임 =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공동체를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시작이 120명, 교회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자서 사역하지 않으시고, 12명, 70명의 제자를 두어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교회는 구원의 표징으로 필수적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각 지체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들은 머리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지체들입니다. 이 교회는 성경 위에 설립되어지며, 성경으로 운영되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말씀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 교회는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성도를 더욱 성도답게 만들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 셋째, 성례(세례와 성찬)를 거행하는 모임입니다. 교회의 회중은 어쩌면 성례를 거행하기 이한 모임일 수도 있습니다. 넷째,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는 연결하는 점입니다. 모든 곳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연결하고, 기도로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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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례 준비] 추도예배 

 

 

 

장례준비및 진행

 


장례예식이란 임종때부터 입관, 발인, 하관식까지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나라마다, 지방마다, 종교마다 다르며 시대의 변천에 영향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이 장례예식은 어느 가정에서나 당하는 일이지만 미리 준비가 되는 일이 아니고 막상 닥치고 나면 가장 경황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예식보다도 준비가 복잡하고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고인과 가족의 신앙에 맞도록 치루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교리에 위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슬픔을 당하여 경황이 없는 가족을 위하여 간단한 절차를 말씀드립니다.

 


1. 임종전 준비

죽임은 누구나 맞이 하는 것이지만 그 형태를 구분하면 갑작스러움 죽음과 어느 정도 예견되는 죽음을 구분됩니다. 여기서 예견된 죽음(의사의 진단)을 살펴보면 비록 슬픔중이지만 고인을 편안히 모시고 특히 고인과 유가족들의 문상객을 위하여 사전에 준비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1) 마음에 준비 ==> 가족, 친지, 친구분들에게 연락하여 마지막 모습과

                     마음의 정리를 합니다.

 2) 유언에 관한 준비  ==> 가훈, 재산상의 처리(자필,녹음,공증), 후손을

                           위한 마지막 모습

 3) 장례절차에 의한 준비 ==> 장례절차 합의(어떤 종교식, 장례집례자,

                             호상및 장의위원 선정)

    호상(護喪) ; 전체상황을 아는 친척이나 교인중에 선정하여 상사 일체를

                총감독한다. 필요시에는 호상을 보좌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4) 부고에 관한 준비 ==> 부고장, 부고명단 정리, 부고자및 연락자 선정

 5) 기타준비 ==> 사진, 장례비용, 음식종류및 준비자 선정

 


2. 임종시

임종이 임박하거나, 임종 즉시 미리 정해진 장례예식 집례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합니다.

 1) 의사의 진단

 2) 호상이 주관하여 장례집례자 연락및 장의사 연락

 3) 임종예배를 드립니다.

 4) 입관,발인,하관의 시간및 날짜 결정과 알림

 5) 부고(訃告) ==> 부고자및 연락자

 6) 염습(殮襲) ==> 목회자, 집안 어른, 장의전문가中에서 선정

    임종예배후 수세를 한다.

    24시간이 지난후 입관전에 염습을 한다.

 7) 빈소(고인 사진,녹음기,찬송가테이프)및 장의물품 준비(관,수의,상복,사진,

    향,꽃,각종 물품)

 8) 음식준비(병원영안실에서는 불사용이 금하는 것이 많고, 불편하여 외부

    에서 음식을 하여 나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음식의 종류는 많은

    것보다는 간소하면서도 정결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9) 장지연락및 영구차 예약(필요시에는 친지중에 한분이 장지준비를

    위하여 다녀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10) 사망진단서 발급하여 시체 매장신고서(주소지 동사무소)를 하고 매장

     사용 승락서를 받는다.(고인 주민등록증 반납)

 

3. 입관시

임종후 보통 24시간이 지난후 실시합니다.

 1) 집례자와 장의전문가에게 미리 준비하도록 알려줍니다.

 2) 유족은 상복을 입습니다.

 3) 입관물품은 장의전문가가 준비및 진행합니다.

 4) 입관예배를 드립니다.

 5) 안치를 합니다.

 

4. 발인시

장례식(葬禮式)을 발인식(發靷式)이라고도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고별식,영결식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장례의 촛점은 죽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신앙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장례일은 보통 3일장,5일장,7일장으로 지냅니다.

 

 1) 장례식 전날

  ① 발인식전날에 장지상황을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묘지,음식,영구차)

  ② 운구위원 선정및 운구물품(장갑, 우천시 우의및 새끼줄)

 

 2) 장례식날

  ①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인예배를 드립니다.

  ② 운구위원은 정중하게 행동하며 인위적인 울음이나, 곡을 삼가하고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③ 주일은 피하고 시간은 장지의 거리를 생각하여 정합니다.

 

 

5. 하관시

 1) 장지에 도착하여 묘역(墓域) 평평한 자리에 관을 내려 놓고 유족들은

    관옆에서 하관식을 기다려야 합니다.

 2) 장의전문가의 지시에 의하여 하관식을 준비합니다.

 3) 하관예배를 드립니다.

    집례자 상부중앙, 상주와 유족은 오른편, 조객들은 왼편에 마주 둘러섭니다.

 4) 하산하여 음식을 조객에게 제공합니다. (하관예배시 몇분이 미리 준비합니다.

    선산시에는 미리 상의하여 마을에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6. 장례식후

 1) 장지에서 귀가하여 유족을 위한 예배를 드립니다.

 2) 다음날 인사장보내기(장례위원,조객)

 3) 주상및 유족대표 그리고 호상이 모여서 장례비용을 결산한다.

 4) 첫성묘는 보통 3일만에 가는 것이 상례이고 이를 보통 삼우제(三虞祭)라고 부르는데 이는 혼백(魂魄)를 모신다는 민속신앙적 제사용어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는 장지에서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5) 상기(喪期)는 옛풍습에는 상복을 2년을 입었지만 가정의례준칙에 의하면 부모,조부모,배우자의 상기는 사망후 100일로 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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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십일조에대 대한 초신자 안내 

헌금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이 당혹스러운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 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함이 돌려지는 것을 보고서 과연 내가 내는 헌금이 어디에 쓰여지고 또 왜 내야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다면 헌금의 정의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달이면 한달동안, 이모양 저모양으로 돌봐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 지혜, 재능 등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전부 그의 것이며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위탁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일부 혹은 전부를 다시 그에게 돌려 보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헌금의 중요한 의미로는 신앙조직의 집단이며 공동체인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의 의무입니다. 헌금이 쓰여지는 선교활동이나 구제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헌금생활은 개인생활의 기도와 성경공부 및 믿음에 힘쓰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습니다.


헌금은 왜 드립니까?
헌금을 드리는 가장 기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과 ,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2)고 하셨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말 3:10)고 하셨으므로 순종의 의미에서 드리며, 교회의 기능중에 하나인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말고도 교회의 행사와 운영을 위하여서도 헌금은 필요한 것이며 특히 복음전파를 위해서 헌금의 뒷받침은 매우 긴요합니다. 금전은 인격시험의 시금석입니다. 금전에 대한 자세로 그의 인격과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감사하고 헌금할 줄 아는데 따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는 교인의 올바른 마음자세는 모든 주어진 선물은 자기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위한 선물인고로 당연히 가난한 형제에게도 분배되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성령으로 건설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한 교회 내에 말씀의 사역자를 위시하여 개개인에게 직분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면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헌금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또는 국내외 전도를 위하여, 또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규칙있게 계획적으로 헌금하는 행위는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고 있는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헌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각 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신자가 매주일 예배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리는 헌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하신 것으로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헌금입니다. 예를 들면, 수적인 의미로 100만원 소득이 있는 사람은 90만원을 다쓰고 10만원을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100만원 수입 후 10만원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 90만원을 쓰는 것입니다.
가축에도 십일조가 있으며 농작물에도 십일조가 있습니다. 농작물이나 가축의 경우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하에 가장 좋은 부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을 분배한다는 형제 사랑의 도리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일반헌금으로는 매주일 낮 예배시간에 모든 신자가 드리는 주일헌금을 들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은 여러 가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헌금인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생일이나 입학, 취직, 승진등의 감사한 일에 대한 헌금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절기헌금, 특별헌금, 구역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등의 기타헌금이 있습니다.


헌금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헌금이란 잘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잘못 드리면 하나님께 욕되고 사람에게는 징계가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우선 헌금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세무서에 납부하는 것처럼 헌금의 정당한 수납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바치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사회사업이나 정치자금 같은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정성껏 준비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액면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득(이익)을 얻은대로 그에 비례해서 합당한 헌금을 내야 합니다.
헌금을 통하여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각자의 형편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손수 수고한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 더욱 값지며, 주님 일에 풍족하도록 하는데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헌금의 복은 무엇입니까?
헌금은 교회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의무적인 면에서도 꼭 시행해야 하지만 바치는 자에게도 크게 축복이 되므로 이를 시행함이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큰 축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8:4-6에서는 "이 은혜와 서로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하는 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신자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드릴 때 기쁨을 체험케 되며, 또 마음에 있는 악의 뿌리를 제거시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일조 헌금을 하면 적극적으로는 넘치게 축복을 받게 되고(말 3: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며(말 3:11), 열방이 인정한 만큼 복을 받게 됨을(말 3:7) 성경에서 증언하십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바치는 자는 그들의 자원을 더욱더 넉넉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 이 말씀이 경제 원칙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있습니다.

헌금은 어디에 사용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금은 우선 복음사역과 선교사역에 필요한 자금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 각 부서 활동비 및 교육비로 조달됩니다.
또한 교역자 및 유급 직원들의 생활비(보수)로 충당됩니다. 말씀의 교역자가 그의 가정의 생활비로 인하여 그 직에 전념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비 명목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돕는 부조금으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부의 각종 관리비, 수리비 및 시설 확충비, 교육관 운영비 등으로도 쓰여집니다.
이것 이외에도 교회의 사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역자 양성기관, 전도사업, 교육사업등 이것이 활발히 실행되어지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란 돈이 안드는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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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   장례예배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자들로 발견되지 않으

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잇는 우리가 집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

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애개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

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1. 서 론

 성경은 인생을 여러가지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

하고 이 세상에 와서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언젠가는 본향을로 돌아가

는 것이다.

 2. 본 론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은 날때부터 죽음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온

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도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

다.

 본문에서는 죽음을 세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죽음은 탄식을 벗는 때이다.

     세계의 영웅 나폴레옹은 말하기를 "5대양의 가득찬 물을 인생의

     눈물이 아니오며 6대주에 불어오는 바람은 인생의 탄식소리가 아

     닌가?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죽음은 탄식을 벗는 때이다.

  2. 죽음은 짐을 벗는 때이다.

     인생은 고달프다. 많은 짐을 지고 허덕인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휘를 편히 쉬게 하리라." 주안에서 산 사람은 내 육

     신의 장막을 벗는 날 영원한 안식에 거함.

  3. 죽음은 썩지 않을 것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산 사람은 죽음의 문을 통과해서는 영원한 세계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 14:13에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다

 3. 결 론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 소망을

위하여, 복음 전파하는 수고를 치루어야 한다.

 김활란 박사는 나의 장례식에서는 승전곡을 부르라고 하였다. 믿음의

생활은 승리자민이 걸어가는 생활이다. 기독교 신지들은 한사람의 나

그네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목적을 두고 살고 그 목적을 이루게 되

는 순레자다. 이것이 곧 승리요 기쁨이요 믿음으로 받는 영원한 기업

이다.

 남은 유가족들은 본문 말씀대로 믿음안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믿음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기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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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선교] 우선 순위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 자체를 거부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아직 생활이 안정되지 않았다」「교회에 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가족 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등의 이유로 교회에 다니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판단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삶의 우선순위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리를 지나가다가 제법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깊은 물에 빠졌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보따리를 버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 안에 아무리 귀한 물건이 들어 있어도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우선은 생명을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보따리 안의 귀중품 때문에 보따리를 끌어안고 허우적거리다가 그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고 만다면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생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무엇이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길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고,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요롭게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장10절)


그러므로 어서 속히 예수님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일은 예수님 믿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 다하고 예수님 믿으려한다면 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것 때문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게 되는데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 이런 결정적인 우(愚)를 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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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삶 ] 겸손을 가르치는 시련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

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시련을 보내십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지혜의 교훈을 배우십시오. 베드로는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은혜를 거둬들이시고 죄에 넘어지게 놔두신다면


우리가 겸손해지겠습니까?


우리 행동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거만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또 다른 징계가 따릅니다.


매가 부드러워서 거만함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더 아픈 매를 맞습니다.


겸손하게 만드시는 고난을 피하려면 스스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스스로 겸손한 마음을 갖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매를 멈추십니다.


/찰스 스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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