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포기와 행복

 

 


말씀 : 마5:1-12

제목 : 행복과 포기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부딪치는 문제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있으나 막상 교회에 가려고 해도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희생해야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일종의 취미생활이나 계모임 혹은 인격수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투자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에 비하여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져 잘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은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갖는 생각인지 모른다. 처음에야 어차피 영적인 생명의 진리,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 있음으로 단순히 인격수양이나 혹은 질병의 고침이나 혹은 마음의 위안 등등의 목적으로 나오기가 십중팔구인데 그것을 위한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솔직히 나도 그랬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전에는 취미생활로 서예와 바둑을 주로 했었다. 이 취미생활은 둘 다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는 먹 갈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수직 긋기와 수평 긋기, 사선 긋기 등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그냥 쭉쭉 긋는 것이 아니다. 붓 끝에 힘이 들어가야 힘 있는 글씨가 되기 때문에 붓 끝에 힘을 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먹을 갈고, 줄긋기 연습하고 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다. 남의 글씨를 계속 반복해서 쓰는 것이다. 한 글자를 제법 비슷하게 흉내를 내려면 천 번을 써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만번을 쓰면 그 글씨에 통달하여 자신의 글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엄청난 시간과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서예이다.

바둑도 그렇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듯이 바둑을 두다보면 지면 열이 받아서 또 두어야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또 두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너 시간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밥 먹으러 빨리 안온다고 잔소리도 제법 들었다. 또 낚시도 제법 다녔고, 볼링도 좀 쳤다.

그래서 이러한 취미생활을 즐기다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기가 어렵다. 때로는 교회가 너무 사람을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평안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도리어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헌금 생활도 그렇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다. 회사생활하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기타 다른 헌금 계산해 보면 그것을 계속해서 적금을 붓는다면 노후대책이 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들어 올바른 헌금생활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사실은 처음 믿음 생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갈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교회에 다니려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일까?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더 좋고, 더 유익하고, 더 기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인간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평안하고 더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확실하고, 유일한 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생활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구속당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세상 살다보면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즐기고 싶은 일도 많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다. 이것 저것 눈치보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런데 사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러한 생활가운데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술, 담배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좀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술 담배를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술 담배를 못하면 사람이 째째해지고 좁쌀 영감처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화투놀이도 그렇다. 일반인들 사이에 화투놀이로 재미거리를 삼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 다닐때도 끄떡하면 회식이다, 무슨 경조사다 하여 회사 동료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고, 모였다하면 의례히 술?담배와 함께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또 어느 곳에 모여 앉아서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처음에 남자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 재미로 살았는데 그런 것 다 포기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낙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낙을 포기하면 도대체 인생의 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취미생활이 아니더라도 아까 말했다시피 바둑이나 서예나 낚시나 등산, 가족 나들이 등등의 건전한 취미 생활도 그렇다. 사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신앙생활하지 않을 때는 주일날을 잡아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가족간에 나들이도 가고 마음놓고 앉아서 바둑도 두고 글씨도 쓰고 하는데 주일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면 도대체 내 생활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좀더 나은 것을 위한, 좀더 가치있는 것을 위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가장 현명한 투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리는 분명 무언가 나은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간음이나 이런 적극적인 악을 행하는 사람도 무언가 나름대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무언가 자신에게 유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잠깐이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유익한 것들도 그렇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언가 희생과 투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농사도 그렇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봄부터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해주고, 거름과 물을 주고, 병충해를 방제해주면서 뙤약볕 아래서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못먹고 열심히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박사도 그렇다. 정말 제대로 된 박사노릇하려면 정말 힘들다. 심지어는 가정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벌 사장도 그렇다. 물론 호의호식하며 대접받으며 사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직장의 중역만되어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수많은 투자와 인내와 자기포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더 많은 투자와 더 많은 자기포기와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신앙생활은 어떨까? 물론 동일하다. 신앙생활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어서 보다 행복하게 보다 기쁘게 보다 소망가운데 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익하고 좋은 것을 위해서 무언가를 투자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앙생활의 유익은 세상에서 얻는 다른 어떤 유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돈과도 명예와도 권력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유익을 준다. 기쁨을 준다. 은혜를 준다. 생명의 풍성함을 준다.

그러므로 사실상 잃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 더 좋은 것을 위하여 보다 덜 좋은 것은 당연히 포기함이 현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치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12:24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져 썩으면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희생당하여 없어지는 것 같지만 더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원문의 의미는 ?재산을 상실하고 불행속에서 방황하는 거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 것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데 왜냐? 이런 사람은 세상의 것 대신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대신에 더 나은 천국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정말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4절도 그렇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죄와 부족함과 미련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 진정한 위로가 그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안식과 위로와 소망이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10절에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된 사람인데 왜냐, 바로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역설의 진리다. 진정 세상 것 욕심 부리지 않고 오직 진리 때문에, 생명의 역사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는 자 그 사람이 부유하고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천국을 소유하게 되니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14:27에서 또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수없이 자기부인과 포기와 희생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말씀들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어렵게 무엇인가에 얽매어서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평안을 주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또 요8:32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누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너무 잃는 것이 많지 않느냐고 묻거든 그것은 더 나은, 더 보람있는, 더 가치있는, 더 자유로운, 더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사실을 말해주자.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바르게 알자. 정말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구속이 아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다.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해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포기해야 할 부분은 포기하고 드려야 할 것은 드리고 헌신해야 할 부분은 헌신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이지 세상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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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설교]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제 목: 새사람의 새습관

(에베소서 4:22~24)

 

17년도를 마지막 보내는 주일에, 지난해가 성공의 해가 되었든, 실패의 해가 되었든 망각의 바다에 흘려 보내고 87년 새해를 잘 맞이하고 잘 보낼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 "새사람의 새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 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좇아 가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반대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옛습관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습관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1.새 사람을 입으라

헌 옷을 벗어버리듯 죄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낡은 옷 꿰매어 입듯이 사람이 노력으로 수양하고 교양을 쌓아서 새 사람이 되고 구원 받는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멸망할 옛 사람을 회개함으 로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고 예수그리스도를 옷입듯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새 생명이 되는 것이요, 새 사람이 시작되 는 것입니다.(요 1:12, 3:16, 6:47, 롬10:10등).

말씀은 생명있는 씨앗과 같아서 말씀을 들을 때 믿고 받아 들이면 옥토에 떨어진 씨 같아서 새 생명이 시작되지만, 말씀을 귀등으로 받아 넘기고 믿지 않으면 길바닥에 떨어진 씨 같 아서 새(마귀)가 와서 가로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처음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과거에 마귀의 유혹을 따라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던 옛 습관을 회개 함으로 벗어 버려야 됩니다. 또 밤송이가 영양분을 잘 빨아 들여 익으면 자연히 껍질이 벗겨지면서 탐스러운 밤톨이 쏟아지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과거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행동하는 옛 습관은 인간을 썩게 만들고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다음에는 말씀을 잘 받아먹고 은혜를 잘 받으며 회개하여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끊어 버려야 합니다. 묵은 해를 보내며 썩고 냄새나는 옛사람의 못된 습관을 벗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기 도해야 되겠습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와서 핥아 먹듯이 예수님을 몇년씩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을 때 가졌던 못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술먹은 습관, 도박, 손장난하는 습관, 춤추던 습관, 음란한 습관, 부부싸움하는 버릇, 바가지 긁는 버 릇, 거짓말하는 버릇등 썩어져가는 더러운 습관을 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나쁜 습관 한가지 때문에 임금님 진지 그릇같이 귀한 그릇이 될 사람이 강아지 밥그릇처럼 천한 그릇이 되고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서도 결단력이 있고 결심이 강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 유신 장군이 젊어서 늘 주색에 빠지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의 모친이 "치국평천하를 꿈꾸는 사람이 항상 주색에 빠져서야 어찌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눈물로 타이를 때 그는 결심하고 술집에도 기생집에도 안갔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중 말위에서 졸다 보니 어느새 영특한 말이라 전에 잘다니던 기생집 앞에 와서 멈추어 섰습니다. 이때에 눈을 든 김유신 장군은 말에서 내려 "왜 나를 이리로 데려 왔느냐?"고 호통을 치고 긴 칼을 뽑아 그 애마의 목을 쳐서 떨어 뜨리고 뚜벅 뚜벅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는 설교도 잘하고 똑똑한데 말버릇이 나빠서 늘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다가 어느 낙도 작은 교회에 가서 자기의 입 버릇을 고치려고 밤톨만한 조약돌을 주어서 입에 물고 3년동? 안을 지내고서 말 버릇을 고치고, 환영받는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패배자가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받을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묵은 해와 더불어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육신 의 정욕대로 행하던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2.새 사람의 새 습관을 가지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다운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신 말씀대로 옛 사람의 습관은 십자가에 못박고 새 사람의 습관을 가지고 살 아야 되겠습니다.

1)모든 예배에 출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갈까 말까 망설이고 유혹받는 정도의 신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일날 친구가 등산가자, 낚시가자, 유혹을 받을 정도가 되면 안됩니다. 감히 그런말도 못 꺼내게 엄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밤 예 배시간에 세계복싱 타이틀 매치를 한다고 해도 탁 꺼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가져야지, 무슨일이 있을때마다 곶감 빼 먹듯 하면 아직 좋은 신자 되기는 늘린것입니다. 특히 일주일의 7분의 1, 그 하루는 주님의 날로 성별해 바쳐야 그 가정, 그 나라에 평강과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서 58장 13절, 14절에서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을 행치 아니하며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토요일은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주의 제단에 집을 짓고 보는 참새 와 제비도 부러워하면서 "주의 집에 거하는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고 했고 "주의 궁정(교회)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하면서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눈물 골짜기로 다니며 슬픔과 고통을 만나도 때를 따라 위로의 샘물을 얻게 하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주일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도 열심히 출석하여 T.V앞에서 시간보내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종교가 그렇게 부패했는데도 규례를 따라 꼭 꼭 성전에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것은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다른 헌금은 올바른 헌금이라고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박사가 설교하는 중에 "오늘날 미국 사람의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 대한 채무 이행을 기피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7장 30절) 마당히 갚아야 할 빚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강도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간신히 구원 받았으니 십일조를 여생, 구원에 갖다 부치지는 않습니다마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리우는 리차드 윔브랜드(Richard Wurmbrand)라는 사람은 공산치하에서 그 극 심한 고문을 받으며 감옥 생활를 할 때에도 일주일에 빵 한덩어리씩 주는 것과 매일 더러운 국한그릇씩 주는 것을 받아서 십의 하나씩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더 약한 형제에게 주며 십일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맨솔래덤(mentholatum)의 주인공 알버트 하이드(Albert H yde)씨는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심한 다음 언손에 바르는 약 맨솔래덤을 발명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하나님이 삽으로 떠 넣어주면 반드시 잊지않고 하나님께 떠서 바치곤 했는데 마침 내 하나님께 가장 많이 바치는 신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YMCA에 수백만불을(당시 돈 으로)내 놓았고 일본에서 버는 돈만 가지고 일본 선교사업비 전부를 부담할 수가 있었고 그가 87세에 죽을 때는 150만불(현 150억도 넘는 액수)를 선교사업에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로 축복받은 윌리암 콜게이트(William Colagate)는 16세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을 떠나가 다가 전에 알던 선장노인을 마나서 돈을 벌려고 뉴욕으로 가는데 자기는 비누와 양초 만드는 기술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선장노인은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나서 충고하기를 "언제인가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비누업자(maker)가 생겨날 것이다. 그 사람은 다 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네가 될 수도 있다. 부디 착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께 네 마음을 바쳐라. 그리고 네 소유에서 주님의 것을 꼭 돌려 드려라. 또 정량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비누를 만들어라. 그러면 분명히 너는 번영하고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을 때 콜게이트(Colgate)는 말을 명심하고 교회 생활을 철저히 하며 십일조를 잘 드렸습니다. 처음 1달러를 벌었을때 10센트를 드리고, 점점 축복을 받아 정식 사원이 되고 동업자가 되고 결국 자기의 회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10의 5조까지 드리다가 최후에는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수억만달러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록펠러(Fockefeller)는 어려서 어머니를 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는데 첫 월급으로 주금 1불 50센트를 받아 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그중에 10분의 1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잘살게 된 다고 말씀할때 꼭꼭 하기 시작하여 엄청난 재벌이 되었는데, 부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꼭 가르쳐서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독자들에게 일러 달라는 부탁을 하더랍니다. 십일조를 안해도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지 못하며 언제 날아 갈지도 모릅니 다. 자자 손손 축복받는 재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외에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간증자들이 있는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 가운데 다른 곳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무서운 죄가 된다고 했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한데가 없습니다. 오직 말라기 3장 10절에만 시 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여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바칠때 마다 이럴까 저럴까 시험을 받으면 아직 하나님께서 마음놓고 축복하실 수가 없고 의례히 무슨 수입이나 크건 작건 생길때마다 하나님의 것을 아까운 마음없이 바치도록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습관은 복 받는 습관입니다.

3)하나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대화란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것인데 매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의논하는 것과, 매일 단 두장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그속에서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꼭 찾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 영의 양식을 반드시 먹는 습관을 가졍야 합니다. 기도가 아침의 열쇠가 되어야 하고 저녁의 자물쇠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무슨 문제나 기도로 해결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목숨걸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승리했습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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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지혜의 유익

 

 


제목 : 지혜의 유익

말씀 : 잠3:21-26

여러분, 세상에서 정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유일한 방법인 이 믿음보다 귀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아무 것도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아무것도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는 없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같이 본바와 같이 15절의 말씀에 보면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 즉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그 일이 진주를 갖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지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는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고 사모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정말 이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것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올바른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지 못한 정신 이상자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 지혜의 유익과 지혜의 가치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는 16절에서 지혜는 장수와 부귀를 준다고 하였고, 또 17절에서는 지혜는 즐거움과 평강을 준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18절에서는 지혜는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혜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다.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강, 영생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이상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지혜를 가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더나아가서는 그 지혜를 따라 살라야 한다. 공연히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이나 목표나 방향을 가지고 살것이 아니다. 우리의 방향, 우리의 가치,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기준은 오직 지혜이다. 하나님안에 있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다. 그것을 따라 살면 반드시 영과 육이 은혜를 받는 풍성함을 누린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계속해서 이 천하보다 귀한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지혜를 얻으려면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의 유익을 말하기전에 먼저 지혜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으면 참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인데, 영과 육이 풍성함을 누릴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말씀을 읽고 묵상해야한다.(21절)

오늘 본문 21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항상 우리 눈앞에 말씀이 있게 하라는 이야기다. 눈앞에 성경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은 물론 성경책을 눈앞에 놔두고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는 이야기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판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등의 법 서적을 부지런히 읽어야한다. 의사가 되려면 의학서적을 눈앞에 놓고 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늘 영어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늘 소설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한다. 생명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생명의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할것도 없이 성경은 최대의 지혜서이다. 성경은 유일하게 생명의 구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성경은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지혜를 얻고, 생명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을 알게된다. 그래서 최대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 생명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2:1-3) 왜? 성경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진리의 길이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열매를 맺게 되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라. 묵상하라. 농촌에서 솔직히 농번기에는 읽기가 힘들다. 그러면 겨울철에 1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번 시작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공적인 예배에도 부지런히 참석하라.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적용시키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풍성한 삶을 산다. 은혜의 삶을 산다. 반드시 복된 사람이 된다.

2)지혜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21절 전반절에 보면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삶속에서 적용시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읽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다. 도전을 받는다. 새로운 용기가 솟아난다. 그것을 따라서 살게 될 유익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분명히 보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결단이 생긴다. 그래서 실행하게 된다. 실행하면 은혜가 온다. 은혜가 오면 더욱 신이나서 말씀안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들은 반드시 복있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정말 복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읽으며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읽으라. 묵상하라.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여 은혜를 받으라.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는 자의 유익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은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또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왜 자꾸만 강조할까? 물론 먼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렇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강조할 리가 없다.

그리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또 하나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을 잘 안듣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두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한번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자녀들이 한번 말하면 알아서 하면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이 안되면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꾸만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중요해서 말을 해도 잘 시행이 안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은 성경에서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귀를 기울였으면 이제는 실제로 그 말씀안에서 살자. 그럼 정말 지혜자가 된다. 복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강조하고 있다.

1)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18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18절 전반절에서는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늘은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라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좀 다르지만 의미는 똑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은 자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거기서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이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오직 성경안에만 생명의 도가 있다. 진리의 길이 있다. 영생복락의 길이 있다. 구원의 길이 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때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또 요20:31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하고 믿게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영생복락을 누린다. 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길도 아니다. 다만 믿고 따르면 된다. 말씀을 하나님을 주님을 가까이 하면 된다.

2)아름다움과 은총을 누린다.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장식이란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그것을 지켜 살면 은혜와 은총과 아름다움속에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아름다워 진다. 그 말이 아름답다. 그 인격이 향기로워 진다. 그 마음이 넉넉해진다. 정말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워진다. 심령의 평안함을 누린다. 모든 추하고 더럽고 허물많던 모습들이 사라진다. 모든 이기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욕심과 저주가 사라진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너그러워진다. 왜 진리와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니까.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가니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가장 은혜로운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외양이 아니다. 능력도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권세도 아니다. 부귀도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이다. 가식도 미움도 증오도 질투도 거짓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마음이며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밖으로 표출될 때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갓난아기가 아름다운 것은 왜인가? 그야말로 어둠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다. 미움도 증오도 없다. 순수하다. 깨끗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사는 자는 바로 이런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말씀이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속에 찌꺼기를 제거해 주신다. 태워주신다.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없이 해 주신다. 그러면 그 영혼이 투명해진다. 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은혜를 누려보지 않으려는가?

3)평안을 누리게 된다.(23-25)

오늘 23, 24절에서는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안에서 진리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고,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누울때에도 아무 근심걱정이 없어서 평안히 잠잘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 미움 증오 욕심이 있으면 잠이 잘 안온다. 잠이 잘 안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무엇인가 평안의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잠이 잘 안오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도 별로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신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을 주신다.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육체적인 것이든 세상의 조건과 무관한 평강을 채워주셔서 모든 근심 걱정 물리쳐 주시고 잠자리도 평안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 127:2에서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이나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25,26절에 보면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다.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아니라 설령 우리가 넘어질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넘어지 않게 하심으로 평강을 누리고 설령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것을 이기게 함으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는 멸망의 순간에도, 급작스런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 역사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기에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도 겁 낼 필요도 없고,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정녕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순탄하며 순탄한대로 풍파가 있으면 풍파가 있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죽으면 죽는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7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빌4:6,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을 정리한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시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다만 주님을 믿으라.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하라. 맡기라. 다만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따르라.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그러면 은혜를 누린다. 평강을 누린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우리 온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며 오직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좇아 살때에 진정 지혜로운자로써 주님의 평강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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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명철을 얻으라고

 

 


제목 : 높임받는 삶을 위하여

말씀 : 잠4:1-9

오늘도 계속되는 지혜의 말씀. 다시금 지혜의 필요성, 그 결과를 강조. 계속되는 지혜의 초청.

어떻게 보면 정말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강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또 이야기. 어쩌면 이미 다 말씀해 왔던 부분들, 그런데 또 강조.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잔소리라도 하듯 계속 반복하고 있는가? 물론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만큼 좋은 것이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인생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오늘 7절에서도 말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 지니라.” 여러분, 제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말그대로 제일이다. 제일이라는 것은 첫째를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제일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제일, 그야말로 최상급이다. 최상급은 최고로 좋은 것이다. 그 위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게 제일이다, 저게 제일이다하지만 사실은 제일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제일이라는 것은 지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지혜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지혜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건강보다도 지혜가 더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혜를 제일로 생각하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제일로 생각하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최고의 지혜로 여기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가? 그래야한다. 실제로 그렇다. 지혜가 제일이다. 하나님이 제일이다. 그 안에 있는 은혜가 제일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과 동행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므로 7절에서는 다시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얻은 것, 그러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것을 다 바쳐서라도 다 투자해서라도 지혜를 소유하라는 것이다. 이유는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지혜가 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그러니까 천국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천국을 돈주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사들여야 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 이유야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는 사람은 설령 천하를 얻는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안에 생명의 길이 있고, 세상에서도 축복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다 팔아서라도 이 생명안에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그 무엇보다도 이 지혜를 최고로 여기라. 그리고 그것을 얻으라. 그것을 위하여 투자하라. 그렇다면 이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미 얻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더 큰 지혜를 소유하며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점을 말씀하고 있다.

1.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1절)

1절에 보면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훈계를 들으며, 또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했을 때 「듣는다」는 것은 그냥 귀로만 듣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듣는다는 말은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귀로는 듣고, 마음에는 새기고, 그 마음에 새긴바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듣는다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말에도 말을 잘 들어라하면 그냥 귀로 듣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잘 들어라하면 귀로 잘 듣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인 것이다.

또 「주의하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물론 먼저 「귀를 기울이다, 경청하다, 청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청종이란 말은 말그대로 듣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역시 우리말에도 주의하라 그러면 그냥 조심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올바른 길로 가라는 말인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우선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마음에 새긴을 것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선은 귀로 주의해서 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마음에 새기든지 말든지 할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냥 듣기만 하면 무얼하는가? 마음에 새기기만 하면 무얼 하는가? 마음에 새겨 졌으면 이제는 그것을 따라 살아가야지.

그러므로 우선을 귀로 들어야한다.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자. 새기고 따라가자. 귀로 듣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 하라. 예배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 그러면 참 지혜자가 된다. 은혜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어야 한다.(1,5)

1절에서는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하였고, 5절에서는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7절에서는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얻는다는 말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무엇인가를 획득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투자해서 혹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으라는 그런 말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투자가 필요하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투자가 필요하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도 투자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 보다 더 귀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어찌 투자가 필요하지 않으랴!

요즘 사람들이 노력없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미련한 일이다. 진짜배기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냥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없는 것이다. 설령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공짜로 얻어지는 그 순간 사실을 별로 가치가 없어지고 만다. 그냥은 잘 얻어지지도 않거니와 설령 얻는다해도 그것도 다 무의미하다. 무가치하다.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것에도 투자가 필요하다. 노력이 필요하다. 애씀이 필요하다. 그래서 5절에서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열심히 해서, 무엇인가를 바쳐서 그래서 값진 보물을 소유하라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던 예수님의 밭에 감추인 보화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투자하자. 은혜로운 삶을 위하여 투자하자. 구원의 은총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놀고 먹고 있어도 천국의 은혜를 주신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구원의 은총을 값없이 주셨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값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이다.

그러므로 그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그 구원의 은총을 받았은즉 더욱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그 나라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그리고 나자신의 은혜 충만한 삶을 위하여 그리하자.

3.지혜를 잊어버리거나 버리지 말라.(5,6절)

5절에 보면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고 하였고, 6절에서는 “지혜를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5절에서 잊지 말라고 했을 때 잊지말라는 말은 「잊다, 모르다, 무시하다, 시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겼으면 이제는 그것을 늘 묵상하고 적용함으로써 그 말씀들을 잊거나 무시하거나 희미해지거나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들이 언제나 선명하게 남아서 그래서 그 말씀들이 살아있어서 그 말씀들을 따라 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았는가? 우리의 삶의 현장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살때가 얼마나 많은가? 일상생활속에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고 교회에 와서야 예수님 생각하고, 말씀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나?

또 심지어는 6절에서는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5절에서는 고의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무관심하니까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것이므로 잊는 것도 문제긴 문제지만 버린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버린다는 것은 고의적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 그럴까? 아마도 나의 삶속에서 무언가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그렇지 않을까? 일상생활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했다간 무언가 손해가 올 것 같으면 짐짓 모르는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적 가치관과 물질을 따라 가는 그런 모습은 없었을까?

그러나 이것도 미련한 일이다. 결국은 손해보는 일이다. 설령 물질적인 면에서 혹은 정신적인 면에서 좀 남는 장사를 했다해도 결국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속에서 말씀을 잊거나 더더구나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자. 오직 우직하게 말씀을 따르자. 그러면 반드시 은혜가 오고 기쁨이 온다.

4.지혜를 사랑하라.(6,8)

6절에 보면 “그를 사랑하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그를 품으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그란 지혜를 말한다. 그러니까 지혜를 사랑하여 그것을 마음속에 꼭 품고 다니라는 것이다. 마치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사랑에 빠지면 그 마음속에 온통 그 사랑하는 대상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그를 사랑하고 그를 마음에 품으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성경에서 사랑은 자신을 강요하여 그 사랑하는 대상으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랑에 완전히 붙잡히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강요하면서 그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하여 애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차서 자나 깨나 주님을 생각하며 앉으나 서나 예수님으로 우리의 가슴에 가득차 있는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자신을 강요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5.지혜를 높이라(8)

오늘 8절에보니까 그 곧 지혜를 높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높이라는 말씀은 「둑을 쌓아 올리다. 찬양하다. 값을 비싸게 매기다. 존중하다.」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혹은 말씀에게 적용시켜 보면 지혜를 높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알 수 있다.

그러니까 먼저는 지혜를 높이높이 쌓아올리라는 것이다. 말씀을 사모해서, 말씀을 존중해서 그래서 자꾸만 말씀을 접하면서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자꾸만 쌓아올리는 것, 그것이 말씀을 높이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음에는 물론 말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찬양한다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을 높이고 칭찬하고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하나님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위대한 것이 없으니 최상의 찬양을 돌려야 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다음에 값을 높이 비싸게 매기라는 말을 의미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가장 높게 평가하라는 뜻이다. 이것도 역시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보다 더 높게 평가할 것이 세상에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는 정말 하나님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가? 그렇다면 그 말에 순종하는가? 가장 높은데, 가장 옳은데, 가장 훌륭한데 왜 따르지 않는가?

존중하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들으라는 것이다. 좇으라는 것이다. 그가 최고니까, 그가 선이니까, 그가 생명이니까 그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가 최고다. 그가 제일이다. 그가 선이다. 그가 진리다. 그가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라. 제일로 여기라. 정말 그렇게 여기라. 그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청종하라. 그의 법을 잊어 버리지 말라. 버리질랑 더더구나 말라.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지혜를 얻으라.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얻으라.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랑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다른 어떤 것을 가슴에 품는 것보다도 주님을 가슴에 품고 살라.

그러면 정녕 살게 된다. 진짜 사는 것 같이 산다.(4) 그가 지키신다.(6절)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동행하신다. 인도하신다. 그리하면 영화롭게 한다.(8) 결코 궁색하게 만들지 않는다. 결코 힘들어 지치고 고단하고 슬프게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관을 머리에 두신다.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신다.(9)

우리 온 성도들은 진실로 지혜를 사랑하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이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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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내가 네 가운데 거하리라 

 

 


제목 : 내가 네 가운데 거하리라

말씀 : 슥2:10-13

여러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큰맘 먹고 세차하면 꼭 비가 온다. 고장 난 전자제품이 서비스맨이 당도하면 정상으로 작동한다. 차가 막힐 때 옆 차선이 빠른 것 같아 차선을 바꾸면 내 차선이 막힌다. 급하게 택시를 기다리면 꼭 반대편에서 빈택시가 온다. 운전 중 기름이 다 떨어져 갈 때 꼭 반대편에서 주유소가 나타난다. 이런 경험 들 말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사실은 내 마음의 문제다. 주유소나 차가 막히는 것이나 세차하는 거나 택시가 오고 버스가 오는 것은 늘 본래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어떤 상황에 따라 주변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내 마음이 무엇인가 조급해하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활에서 그렇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믿음 생활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 나의 상황이나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조급해 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조용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될 것이 없다.

Ⅰ.스가랴서의 내용(지난 시간)

스가랴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 1-8장까지는 B.C.520년 경(다리오왕 2년 8월, 학개 다리오왕 2년 6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학개 선지지와 함께 성전건축을 독려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후반부인 9-14장까지는 그보다 약40년 뒤인 B.C. 480년경에 씌여졌다. 이때는 성전이 건축되고 몇십년이 지났음에도 유다의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이 실망하고 있었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는 머잖아 열방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결국 유다를 구속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1.성전건축의 독려와 격려(1~8장)

1)회개의 촉구(1:1~6)

2)성전건축을 위한 격려(1:7~6:15)

3)올바른 신앙생활의 촉구(7:1~8:23)

2.열방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9~14장)

1)열방의 심판(9:1~8)

2)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한 예언(9:9~14:21)

*묵상

①성전을 건축하라. 그러면 복이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②그러나 구체적인 복이 임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분명히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이방은 심판받는다. 유다는 구원받는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다.

1.성전 건축의 독려와 격려(1~8장)

1)회개의 촉구(1:1~6)

(슥1: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훈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돌아오라. 주님의 역사를 위한 일을 미루지 말라. 성전이 삶의 중심이 되게하라.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라.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자.

2)성전건축을 위한 격려(1:7~6:15) - 9가지 환상

①말과 말 탄 자에 대한 환상(1:1~7)

(슥1: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슥1: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슥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교훈

하나님의 순찰 ①독려, 감찰, 감시 ②격려, 위로, 평안, 안도, 승리, 확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순찰하신다.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건설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라.

②뿔과 공장에 대한 환상(1:18~21)

(슥1:18,19)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슥1:20,21)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교훈

때로는 악인을 들어 의인을 연단시키시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오직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진정한 승자가 된다. 세상의 뿔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뿔을 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잠시잠깐의 고난이나 패배한 것 같은 상황이라도 낙심치 말고 주를 바라보라.

*예화 - 똥밖에 없어

어떤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어떤 집 문 앞에 도착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빨리 먹어? 뭘 꾸물거려?”

“가만히 있어봐. 똥 밖에 없어!”

“뭐, 똥밖에 없다고, 그럼 그거라도 먹어야지 어쩔거야!”

“글쎄 좀 생각해보고.... 똥을 먹어야되나 말아야 되나!”

“아, 똥 밖에 없다면서? 그럼, 그거라도 먹어야지 어떡해?”

“알았어, 그럼 먹을 게, 에이, 좋다 먹자!”

“자, 먹었어. 이제 당신 먹어!”

“그래, 알았어, 나도 먹는다고 좀 기다려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둑은 오죽 하면 똥밖에 먹을 게 없을까하고 오히려 자기 주머니를 털어 만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 몇장을 문 밖에 놔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속의 똥은 화투장의 똥을 말하는 것인데 도둑은 배설물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하도 불쌍해서 물건을 훔치려다가 오히려 자기 돈을 주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의도대로 잘 따라가야 한다.

③척량줄을 잡은 자에 대한 환상(2:1~13)

(슥2:1,2)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손에 잡았기로 /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때에 (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교훈

결국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 때로는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재고 계신다. 하나님이 건설하고 계신다. 우리의 할 일은 그저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뿐이다.

④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3:1-10)

(슥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교훈

하나님께서는 그을린 부지깽이라도 싹이 돋고 움이 나게 하신다. 초라하고 볼품없어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 그 역사는 물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더 이상 부지깽이 같은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그 역사를 이루어가야 할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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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예배설교] 찬양의 예배

 


제목 : 찬양의 예배

말씀 : 대하29:25~30

1.예배란?

어떤 사람은 뭐 맨날 예배나 드리면 장땡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는 신앙의 기본이다. 예배생활하지 않으면 설령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소용없다. 왜? 예배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며 찬양하여 영광을 돌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하나님을 안다면 어떻게 엎드리지 않을 수 있나? 어찌 경배 드리지 않을 수 있나?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래서 요4:2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러므로 예배는 철저히 드려야 한다. 그것도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리는 목적으로 드려야 한다. 쉬기 위해서, 좋은 말씀 듣기 위하여, 그저 기도하고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님 하나님,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의 올바른 태도이다. 그리고 그런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목표로 예배를 드리자. 사람을 동원하고 시간을 동원하고 물질을 동원하고 성가대를 동원하고 찬양대를 동원하여 예배를 드리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나 넘치는 삶이 되자.

2.히스기야 왕의 예배의 회복

1)예배를 폐지시킨 악한 왕 아하스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가 왕 위에 오른 뒤 성전을 청결케하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다. 히스기야 전 왕 아하스는 아주 악한 왕이었다. 그것은 대하28:24,25절에 보면 잘 나타나 이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세상에 이런 무지막지한 인간이 어디 있는가? 결국 나라는 에돔과 앗수르와 블레셋에 의하여 고통을 당한다. 그 자신도 불명예스럽게 죽는다.

그러므로 절대로 예배를 폐하거나 방해하거나 소홀히 여기지 말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믿음으로 드리라. 설령 예배 다드려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로 그건 하나님을 만난 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면 결국 망한다. 그러므로 예배생활에 성공함으로 정말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자.

2)히스기야 왕의 예배의 회복

①성전을 회복시키는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대하29:3~5절을 보라.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아버지 아하스 왕이 폐한 성전을 다시 열고 성결케 하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선한 왕 중의 하나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소중히 여기라. 성전을 내외적으로 사랑하고 청결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라. 가까이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②속죄제와 번제를 드림

이와 같이 성전을 정결케 한 다음에 히스기야 왕은 먼저 제사를 드린다. 앞부분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고, 오늘 27절에서는 번제를 드린다. 속죄제란 말 그대로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제사이다. 속죄제물이 내 죄 대신에 죽음으로 내가 내 죄로 말미암아 죽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예배 시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회개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면 된다.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로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약하고 부족하여 또 범죄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범한 부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고 예배드릴 때 진정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배가 되는 것이다.

번제는 헌신과 희생과 봉사를 의미한다. 나를 완전히 드리겠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번제는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하면서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다. 이런 진정한 드림이 없는 예배는 온전치 못한 예배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면, 주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내 죄가 속해졌음을 고백한다면 어찌 드림이 없겠는가? 어찌 엎드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안다면, 죽은 영혼 살리는 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인가를 안다면, 내가 구원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과 수고와 섬김과 드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찌 드리지 않겠는가? 어찌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전을 청결케하고 예배를 회복하라. 회개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예배드리자. 이런 진정한 예배생활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③찬송을 드림

오늘 말씀에 보면 찬송은 예배의 핵심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27절을 보자. “히스기야가 명령하여 번제를 제단에 드릴 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번제를 시작하는 동시에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고 악기를 울렸다.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도 성가대의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한다. 그리고 예배의 기원을 하고 온 회중이 영광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찬양이 예배의 시작인 것이다. 찬양으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 28절에 보면 이 찬양은 번제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그러니까 한쪽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는 동안에 회중은 계속해서 경배드리고 한쪽에서는 찬양소리와 나팔 소리도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제사를 마치자 거기 있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29절 말씀이다.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0절 말씀이다.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 그러니까 찬양으로 제사를 시작 하고 번제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나팔을 불고 찬양을 드리고 번제가 마치자 다 같이 엎드려 경배드리고 다시 찬양함으로써 번제를 마치게 된다.

곧 찬양이 예배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장 핵심은 번제와 속죄제이다. 속죄제를 통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입고 번제를 통하여 헌신과 희생과 섬김과 복종을 다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것이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헌신과 희생을 다짐한다. 메마른 영혼에 생명의 양식으로 채워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찬양으로 시작하고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찬양이 계속되고 끝날 때 찬양으로 마치는 것이다. 즉 제사와 찬양이 두축이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찬양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과 자비하심을 알고 그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찬양이 곧 우리의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경배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 앞에 엎드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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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예배설교]우리를 택하신 이유

 

제목 : 우리를 택하신 이유

말씀 : 딤전1:12-17

우리는 정말 감사할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어딨나? 내가 무얼 잘나고 선하다고 날 찾아와 만나주셨나? 뭐 남보다 선하다고 날 구원해 주셨나? 내 생명, 시간, 육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천가지 만가지 억가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겠나!

만약 우리가 자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어 별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근심 걱정 염려 불평하며 산다면, 아니면 맨날 더 달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적으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 부모 앞에서 억지로라도 행복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1.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직분 맡겨 주심에 감사함(12,13절)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예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사와 기쁨 속에 죽도록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설령 충성되이 여겨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도 일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세워주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고 영광 돌릴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 같은 것을 주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나 같은 것을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나큰 영광인가?

게다가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추한 존재였나?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나? 얼마나 많은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었나? 그런데 그런 나를 주님의 자녀로 받아 주신 것이다. 주님의 자녀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왕자가 되는 것도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재벌의 자녀가 되는 것도 제법 누릴 것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까짓 것들과 비교나 되겠는가?

또한 우리 각자에게 귀한 달란트와 사명을 주셨다. 직책과 직분을 주셨다. 이게 보통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명암에 근사한 직함을 새겨 가지고 다닌다. 무슨무슨 박사 ○○○, 변호사 ○○○, 의사 ○○○, 국회의원 ○○○, 나는 목사 조학환이다. 나는 이게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로 ○○○ 이것도 엄청난 영광이다. 꼭 목사 장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사 ○○○, 집사 ○○○. 꼭 직분자만 그런 게 아니다. 성도 ○○○, 이것도 얼마나 굉장한 이름인가? 아니 사실은 이게 가장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성도, 대단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자녀. 이 이상 더 귀한 이름이 어디 있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이게 상상이 가나? 세상의 무슨 직함이나 직책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단 말인가? 또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빛으로 생명으로 은혜로 인도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귀하겠나?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아름답겠나? 중요하겠나? 보람 있겠나? 가치가 있겠나?

게다가 나 같이 자격도 없는, 공로도 없는 인생에게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믿음과 이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요, 그저 영광 돌리며 기쁨으로 감당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주의 풍성하신 은혜에 감사함(14절)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주님의 자녀가 되고 게다가 귀한 직분까지 맡겨 주신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셨든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질병이나 환난을 통해서 했어도, 설령 나 혼자 믿게 되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이다.

안 그런가? 뭐 우리가 그렇게 남들에 비해 특별하게 착하게 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더 겸손한 것도 아니고, 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나를 부르셨는지는 모른다. 그건 그냥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요, 그것이 결코 내 의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의와 공로와 겸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저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미련하고 부족하고 직분이나 직책이나 달란트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긍휼을 입은 까닭.(15,16절)

딤전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살인죄나 음란죄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 도덕적 윤리적 죄보다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가표를 던지고 하는 일이 더 큰 죄이다. 물론 윤리적 경제적 정치적 죄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악한 죄이긴 하지만 복음의 역사를 막는 자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 죄수까지도 회개하는 자는 받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죄까지도 참으사 구원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죄인에 대하여 참으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도 참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며 복음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야 될 것에 대한 모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 괴수와 같은 날 참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도 참고, 심지어는 내게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음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요 사명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4.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17절)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직분을 맡겨 주신 것,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 죄인 중의 괴수를 불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보내고 있다.

만세의 왕이란 시간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고안해서 손으로 만든 어떤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를 말한다. 홀로 하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만이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유일하신 참 신이므로 이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다.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오직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지의 주재이시다.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시간적 질적 공간으로 완전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 의하여 모든 역사는 진행된다. 알든 알지 못하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람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 구원해 주셨다.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자.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자.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발하여 주님 품으로 인도하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출처: 조학환 (하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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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청년부 헌신예배 청년들에게 새 힘)


주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저희들을 주님의 은혜로 지켜 보호하여 주시고 오늘 이렇게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주님 앞에 찬양 드리며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특별히 자신의 주장과 패기만을 앞세우며 살기 쉬운 청년 시절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으며 주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사랑의 주님!
하지만 젊다는 이유로 지나친 자만심에 사로잡혀 살아온 청년도 있을 줄 압니다. 젊음과 패기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청년들도 있을 줄 압니다. 이시간 젊음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사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하게 하시고, 인생의 주인이 되신 주님께 겸손히 자기를 내어 맡길 수 있는 청년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청년들 중에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지 못하고 기분에 이끌려 교회의 문턱을 밟는 청년들도 있을 줄 압니다. 우리 주님이 그 심령 속에 찾아 가셔서 저들의 영안을 밝혀 주시사 인생의 참된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게 하여 주시옵고 주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일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주님을 위한 열심과 열정이 교만함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앞서가는 지나침이 되지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교회를 통하여 불러주신 주의 청년들이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데 한결같이 귀중한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청년들의 헌신을 통해서 더욱 건강히 교회, 젊은 교회가 되게 하시고 독수리 날개 짓 함 같이 강한 믿음으로 비상하는 힘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헌신의 삶을 살고 져 헌신을 다짐하면서 주님께 드리는 청년들의 헌신 예배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 주시옵고 이 청년들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도구로 삼아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청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단위에 세우신 목사님을 기억 하시고 선포 하시는 말씀마다 권세를 더하여 주셔서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들과 모든 성도들이 심령의 뜨거움을 경험하게 하시고 새 힘을 얻어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 하오며 죄인은 아무 공로 없사오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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