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생명의 말씀] 소금과 빛


 


 

마태복음 5:13∼16

우리 인생에서 언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에 대한 정체성을 확실하게 깨닫고 그 목적대로 살아갈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가운데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소금의 삶이요 빛의 삶일까요.

먼저 소금의 사명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0)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골4:6) 소금이 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의 말을 은혜 가운데 화평케 하는 말로써 화목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에서는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우리에게 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직책을 감당하기 위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고후6:3).

이제 우리 모두 화목케 하는 사신이 되어 이 직책을 잘 감당하여 나로 인해 우리의 가정과 사회, 나라와 정치가 회복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받는 축복된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다음은 빛의 사명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성도는 성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옳은 행실이 있고 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 행위를 요한복음 15장 16∼17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사랑의 과실을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김봉구 여수문수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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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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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부활의 진리와 부활의 기쁨

 

 


  성경 ; 시118:14-25, 고전15:1-11, 요20:1-18
  제목 ;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할렐루야,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에
게 언제나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와 여
러분이 부활의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닫고 확실하게 믿음으로써,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주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이다(고전15:14)’라고 했습니다. 바울
은 다시금 강조하기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
들도 망했을 것이다(고전15:17)’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만일 기독교
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피
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고전15:19)’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
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믿을 경우, 믿음생활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지 아니 믿는지 알 수가 없는, 그처럼
흐릿하고 불분명한 신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확
실한 믿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신앙은 살아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는 날이 갈수록 썩어문드러지
지만, 살아있는 나무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성장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
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그 생활하는 모습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밝은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지금 사는
것이 많이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
수께서는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을 승
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기어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는 ‘두 손이 없는 소금장수, 강경환 씨의
장엄한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
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한 포대씩 놓여 있곤 했다는 것입니다. 13년째나 계속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지난해에 그 주인공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강경환 씨입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두 손이 없는 그가 염전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람이 남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두 손을 잃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해변에서 깡통
하나를 발견해서 갖고 놀다가 돌로 그 깡통을 두드려댔는데, 그 순간 그 깡통
이 터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깡통은 6․25 동란 때에 묻어놓은 대인지뢰였습
니다. 이때, 그는 그만 두 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 보기가 부끄러워서 중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그
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먹여주고, 소변까지 뉘
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외갓집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그가 스스로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소변보는 일도
스스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힘들어서 농약 먹을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
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주막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집에 왔는데, 책상에 유인물이 하나 있
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걸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인물에는 팔 둘과 다
리 하나가 없는 ‘정근자’라는 사람이 교회에서 간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
니다.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 간증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절반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람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 정근자 씨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답장이 즉시 왔습니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강경환 씨는 기자에게 “나에게 손이 있었다면, 나는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근자 씨로부터 편지를 받은 이후, 술을 끊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
니다. 삽질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면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다니던 교회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염전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피눈물
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짓는 삽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큰 삽을 두 손
없이 사용해야 했습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서, 그는 하루 2시간만 잠을
잤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을 잃어버
린 대신에 얻게 된 귀중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랑을 직접 이웃에게 실
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금 한 포대에 만 원을 받으면, 거기서
1000원을 떼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금을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록도에도 해마다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냈다고 합니
다.
    그는 2001년에 시청에 자발적으로 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는 또한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고 하
면서, 한 달에 6만원씩 받는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염전이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의 실천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사춘기 때에 손을 잃어버리고 청년시절까지 방황하다가 얻게 된 그 소중한 믿
음이 그로 하여금 계속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하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강경환 씨는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그는 손만 잃
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살았으
나 죽은 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근자 씨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
를 믿게 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삶을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는지요? 진정
부활의 진리를 바로 잘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두
손이 없는 강경환 씨보다는 좀 더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그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쓸모없는 우리 인생을 존귀케 하
시려고 부활신앙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우
리는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1.부활의 진리를 잘 깨닫고 그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 이하에서 ‘나는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는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
릴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
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덕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
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아
니라, 그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난 후에, 그는 부활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 편에서 볼 때에, 바울은 과거에 아무 쓸모가 없는 정도가 아니
라, 복음전도의 방해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후에
는, 복음전도의 방해자가 아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새 인생을 살았던 것
입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
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만방
에 떨쳤던 아주 유명한 황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방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세오졸프’
라는 사람을 체포해서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서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했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
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
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그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던 루이 14세
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의 왕' 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멈추게 한 후에 감옥으로 들어가서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석방해서 자
유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 15절에서, 시인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집집마다에서 들려
오는 저 소리, 기뻐서 소리 지르는 저 환호성을 들어보아라. 여호와께서 힘쓰
시어 엄청난 일, 곧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
에서 ‘여호와께서 이루신 이 일, 그저 놀랍기만 하여라. 이 날은 여호와께서 승
리를 안겨주신 날, 다같이 기뻐하며 함께 잔치 벌이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를 경우, 새로
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우리 모두 부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이 묻히신 무
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빈 무덤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에
예수님이 입으셨던 고운 베옷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
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
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주님을 모셔갔는데, 그분
을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 등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
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느냐?”마리아가 예수님께 “당신이 그분을 옮겨가셨다면 어디다 모셨는지 알
려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도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얼떨결에 주님을 붙잡고 “선생님!”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
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이제 너는 내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올라
간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했습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께
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그를 살려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인간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
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곧, 죽게 될 사람이 어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습
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집에서 살게 된다 할지라도 죽음
을 앞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진정 평안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
렇게나 살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
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면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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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교회 헌신예배설교 ] 주님의 포로

제목 : 주님의 포로

말씀 : 고후5:13~15

1.가장 좋은 것에 미쳐야 합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고 또 거기에 푹 빠진 것을 ‘미쳤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에 미쳐 공부만하다가 유능한 학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노래에 미쳐서 밤낮없이 노래만 하다가 좋은 가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축구에 미쳐서 밤낮 공만 차다가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 미쳐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악한 것에 미쳐 속된 말로 인생 조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과 마약에 미쳐 말 그대로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향락과 술과 담배에 미쳐 자신과 가정을 망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악은 아니지만 뭔가에 잘못 미쳐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주로 취미생활인데 취미생활은 바르게 잘하면 삶의 활력소가 되어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만 잘못 미쳐 도에 지나치면 자신과 가족을 힘들게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망하게 만드는 세가지 취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건 자동차와 오디오와 카메라인데 이런 것들은 물론 싼 것도 있지만 비싼 것은 몇 백만 몇천만원씩 가고 또 하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새로운 것,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찾다가 집안을 망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진에 미친 사람들은 보통 카메라도 몇 대씩 되고, 렌즈는 한 여나므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 몇백만원씩 되고 몇천만원 되는 것도 많습니다. 심지어 삼각대하나에 몇백만원짜리도 있고, 그 밖에 스토르브며 스크린하며 액세서리도 몇 십 종류되는데 제가 조금 아는 어떤 사람도 카메라 장비가 근 1억에 가까운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무엇인가에 미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그건 자기가 미친 그것에 돈과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으면서도 전혀 아깝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생의 낙이고 기쁨이고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엇에 미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혹시 아직 예수님께 미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당연히 가장 큰 행복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에 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혹은 무엇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닙니까? 물론 세상의 것들도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은 금방 쇠하고 없어지고 썩어지고 떠날 것들이고 그나마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도 참된 행복과 기쁨과 은혜를 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에 미치지 말고 진정한 것, 참된 것, 영원한 것, 진짜 행복을 주는 것에 미쳐야 하지 않습니까?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시16:11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보십시오. 생명을 주시고 풍성하게 하신다.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여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무엇에 빠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께 미쳐서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분문에는 이와 같이 예수님께 미쳐서 살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13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게 미쳤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바울을 시기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자신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나 때로는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고, 때로는 남다른 방언을 하고 하는 것을 보고 미쳤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에 취하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합니다. 미쳐도 곱게 미치지 헛된 것에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자기들이 얼마나 죄와 무지 속에 있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허무한 것에 미쳐서 살아가는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 실상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진짜배기에 미친 사람입니다. 완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주는 진짜에 미친 가장 온전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3: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세상의 것을 똥으로 여겼다. 말 그대로 미친 것이지요.

그러면 왜 미쳤습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고상하다는 것은 그냥 좀 인격적이 훌륭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능가하다, 탁월하다,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의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은총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고 놀랍고 엄청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은 배설물처럼 보였고 그래서 거기에 미쳐 자기 인생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그리스도를 앎으로 얻는 은혜와 축복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다. 또 지식적으로도 세상의 무슨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크고 놀랍고 굉장한 것이 있겠습니까? 우주만물의 창조와 인간의 기원과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는 이 지식보다 더 크고 고상하고 높은 지식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무슨 과학이나 문명이나 지식이나 윤리도덕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크고 위대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지식입니다.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알려주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너무나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세상의 정말 별 것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게 좌지우지되거나 그것을 바라보며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오직 믿음 가운데 주님의 말씀과 방법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그 가장 고상한 지식이 주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미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그 엄청나고 위대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사랑을 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그 엄청난 은혜를 안다면 어찌 주님을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다고 하였습니다. 강권이란 한마디로 ‘붙잡혔다, 포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포로가 된 것은 어떤 강제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녀 간에도 죽도록 사랑하며 어떻게 됩니까? 사랑의 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게 됩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제주도나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갑니다. 이렇게 하라 그러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그러면 저렇게 합니다. 꼼짝 못하고 끌려 다니는 것이지요.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강요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만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죄와 무지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너무너무 사랑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만 해도 엄청난 희생을 치룬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다가 심지어 십자가에서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수치스럽고 비참하고 끔찍하고 저주받은 죽음을 죽으므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엄청나고 놀라운 사랑을 받아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주님을 알고 만난 사람이라면 어찌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님이 오라하며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면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과 분부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사랑의 포로가 되면 헌신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마땅히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랑한다면 마땅히 자신의 모든 물질과 시간과 정열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자녀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는 오죽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홀로 영원히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영원한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건지셨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영광만을 받으실 주님께서 나같은 무지렁이를 찾아와 주셔서 만나 주시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이 영광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안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15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을 살아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물론 영적으로지요.

그러면 살아있는 자는 무엇입니까? 물론 근본적으로는 영원한 둘째 사망 즉 지옥에 처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 즉 영생복락을 누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거듭난 자라로서 새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죄와 무지에 속한 옛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가치관과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이므로 당연히 죄 가운데 머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의와 진리와 선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선과 의와 거룩 가운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인생이요,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새로운 존재가 되면 마땅히 주님을 위하여 살게 마련인 것입니다. 15절 후반부의 말씀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롬6: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그러므로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한다. 이런 말씀이지요. 당연하잖아요? 옛 것은 죽고 거듭났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새 삶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뭡니까? 거룩하고 성결한 삶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입니다. 그럴 때 물론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히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행복한 포로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전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복을 주시는 주님의 포로가 되었은즉 세상의 헛된 것으로 소망과 기쁨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을 살피며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 거룩하고 진실하고 사랑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을 그저 자신의 육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남선교회 회원들과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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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양예배설교 } 새 노래로 찬양하라

 

 

 

 


제목 : 새 노래

말씀 : 계5:9-12

1.찬송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찬송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치 약방에 감초와 같아서 신앙생활에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예배에서도 찬송이 없으면 예배가 안될 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뭐 당연하지요. 여러분, 찬양이 뭡니까? 사람이나 기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아름답고 훌륭하고 멋있고 위대함을 크게 기리고 드러내는 일입니다. 찬송은 그런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교회의 찬송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구원하심에 대하여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그 영광과 구원과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의와 선의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하며 크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구원하심을 알고서야 어떻게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 놀라운 사실을 세상에 널리 전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세상에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가 바로 찬양인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토록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47: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시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찬양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그야말로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선과 의와 구원과 거룩의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가운데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같이 중요한 찬양생활을 할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은 찬송은 인간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사랑과 의와 선과 지혜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 선과 의로 가득하신 하나님, 그래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는 그저 벌레와 같은 존재요 오직 하나님만이 온 우주만물에게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찬송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보너스이지 그것이 진짜 찬송의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왕이면 최대한 목소리도 가다듬고 박자와 음정도 맞추고, 좋은 악기도 동원하여 아름답고 훌륭한 음악성을 가지고 찬송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일류 합창단에서 최고의 찬송을 부르거나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최고의 연주자들이 최고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건 찬양이 아니라 그냥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찬송을 부를 때에 진정한 신앙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기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부르는 건지,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래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젊은이들 멋있게 신나게 찬양할 때보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부르는 건지 아니면 교인들에 보여주고 들려주려고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또 성가대 찬양이나 성도들이 특송을 부른 후에 박수를 치는 문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그 박수가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박수라면 모르겠으나 박수 치는 모습을 보면 그다지 그런 것 같지를 않습니다. 학교나 기타 다른 단체에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나 노래를 부르고 나서 잘했다고 박수를 쳐 주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특송하고 나서 ‘와 잘한다.’면서 박수를 친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박수입니까? 마치 가수나 합창단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서 박수를 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시117:1절을 보십시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또 고전10: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누구를 찬양합니까? 누구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누구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찬양을 비롯한 모든 신앙적 행위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구원하심과 사랑을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찬송, 하소연하는 찬송, 자신의 평안과 만족을 위한 찬송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은혜에 영광을 돌려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런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부르려면 어떻게 찬송해야 합니까?

3.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만난 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조금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어떤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역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믿어야 두 번째는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바르게 분명히 알고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게 온전한 신앙고백이 되고 그래야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그러면 찬양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신앙고백속에 찬양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속성이란 그 분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으로 당연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확실하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야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아도 혹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회 속에 온갖 부조리와 죄가 만연되어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라가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일 뿐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선과 의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답답하고 외롭고 걱정근심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과 의와 사랑과 진실로 건재해 계십니다. 때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왜 하나님께서 방관하고 계시는지, 떻게 선을 이루어가실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지전능하시며 선과 의와 지혜와 사랑의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시63:3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또 시135: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성실과 인자와 거룩하심과 높으심으로 인하여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나 세상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이 어떻게 알고 이해하고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선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이런 것들을 벗어던지고 겸손히 엎드려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모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는 삶을 살려면 우선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 밖의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인도하심이었음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적이로든 물질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 어떤 영역에서든 우리가 이렇게 살아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주관하시며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우리가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도 육신도 물질도 시간도 영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된 것입니다. 숨 한 번 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역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 어떤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여기에 보니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봉은 심판의 판결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를 봉인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떼는 순간 심판이 집행되는데 이 인봉을 떼어 심판을 집행할 권한은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런 권세를 본래부터 가지고 있거니와 게다가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심으로 그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믿지 않으면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12절에서는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주님만이 오직 홀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고백하며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죽임당하신 어린양,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능력과 권세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역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서 무엇을 한들 인류를 살리는 이 사역에 비견되겠습니까? 세상에서 어떤 위대한 일이 이보다 더 위대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히 갖다 댈 수가 있겠습니다. 이걸 알고 믿으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의와 선하심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맥추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모든 상황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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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설교:: 인류 구원을 위해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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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주님과 동행


말씀 : 요20:19~21

제목 : 주님과 동행

1.매순간 부활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주일은 지난 주일만이 부활주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부활주일이고 다음 주일도 부활주일이고 매주일 아니 매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난 주일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가운데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이 매일 매순간 함께하며 힘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니까 이천여년전의 그때만 아니라 또 매년 돌아오는 부활절 뿐 아니라 우리는 매순간 부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주일 하루만 주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다. 와! 대단하시다. 이런 구호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 부활의 주님이 내 삶을 지배함으로 매일 매순간 부활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 그냥 그 옛날 이천여년전에 부활하신 주님으로 끝나버린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역사적 사실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성, 경험, 과학, 지식, 논리를 초월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세주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인정한 다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지금 나와함께 계신 부활의 주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그 은혜와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인정은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나팔은 불기 전까지는 나팔이 아니며,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걸 따라가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려면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하고 사랑하며 경배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이 온전히 내 심령속에 거하게 됨으로 자연히 부활의 주님의 그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충만하게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20:38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심령속에 모신 사람은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여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이시며 그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사람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함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는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내 심령의 왕좌에 모셔 들이고 그 주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늘 주님과 가까이 대화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통치자, 나의 주권자, 나의 인도자로 온전히 인정하고 그 부활의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저와 여러분은 진정 살아있는 자로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주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어떤 능력이 임하게 됩니까?

2.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면 우리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의 모든 어두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 즉 마귀 사탄, 어둠의 권세, 무덤의 권세,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에 보면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 있던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요20: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눅23:27절에 보겠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마27:56절이나 막15:40에 보면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그 모진 고문과 멸시천대와 채찍질을 당하시고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피를 흘리며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고통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27:61절에 보면 아리마대 부자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지내 드릴 때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3시였는데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 여섯시 장례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 세 시간동안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고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내려 무덤까지 모시고 가서 몸을 씻겨 드리고 향품을 바르는 등 모든 절차를 제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장례는 서둘러 대강대강 진행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던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 모진 고통과 멸시천대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만도 너무나 마음이 아픈데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다가 안식일이 끝난 첫새벽에 부랴부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의 무덤가를 찾은 마리아는 또다시 좌절감에 빠집니다. 어떻게 향품이라도 한번 발라드리려고 잠도 못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건만 이번에는 그마나 그 시신마져 없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그나마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하여 향품이라도 어떻게든 발라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시신마져 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슬픔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20: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랍오니’하고 대답합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오 주님, 주님 맞습니까? 오,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시네요. 이런 이런 정말 주님이시네요.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군요. 오 주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살아계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슬픔에 잠겨있었으니.. 오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의 슬픔은 단번 싹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61:3 상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이런 은총이 주어집니다.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십니다. 근심대신 찬송을 주십니다. 절망 대신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망권세, 어둠 권세 모두 이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도 남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혹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근심과 염려가 있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찾아오셔서 마리아야! 조목사야, 김장로야, 이권사야! 박집사야! 아무개야! 하면서 불러주십니다. 그러면 그 한마디면 끝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염려 슬픔 다 물러갑니다. 아무개야! 걱정말아라. 슬퍼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잖니? 내가 너를 도우마. 내가 네게 힘을 주마. 내가 너를 건져주마하시며 다가오셔서 우리로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절망속에 빠져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 모든 근심 걱정 슬픔 절말 한방에 싹 물리쳐 주신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갈 때에 그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다 이기고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1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와, 우리 선생님 대단하시다. 와, 우리가 이 굉장하신 분의 제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와, 이런 분이라면 우리가 목숨을 바쳐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했던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병정들에게 당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그들은 그만 겁에 질려 모두 도망가 버렸고, 죽어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고향으로 돌아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군중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니 도망가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저들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문을 잠겨져 있는데 예수님이 불쑥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무슨 말씀입니까? 왜 두려워 하느냐? 보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보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다시 살아났느니라. 나는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너희가 힘을 주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를 만져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려움과 절망 속에 꽁꽁 묶여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묶고 있던 두려움이 끈이 풀린 것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주님,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그토록 의지했던 주님을 잃고 실의와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찾아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고 좌절과 슬픔속에 빠져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을, 근심 대신 찬송을 주셨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실의와 좌절과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처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세상의 두려움과 약함과 핍박을 이기고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슬픔 두려움 절망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다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께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평강이 나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6:3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노라면 때로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대적자들의 도전으로 환난을 당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면 너희 또한 세상을 이길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약함과 추함과 죄와 어둠과 지옥과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전에 부활하셔서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부활의 주님과 늘 가까이서 교제하며 대화하며 의지하며 신뢰하며 믿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더럽고 추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이기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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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제목 :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말씀 :아모스 8:11-1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니라 (아모스 8:11)

우리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풍요로워졌지만 내면적으로는 주리고 갈하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와 결핍을 느끼며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주의 말씀뿐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는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인도하는 나침반입니다.

삶의 방향을 알면 불안하지도, 공허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실패하거나 넘어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본능과 죄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성경 말씀대로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위로와 만지심도 맛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리고 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양식을 삼아도 문제입니다.

말씀은 지식이나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세포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나를 살게 하도록 말씀은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 지성업 목사 대전산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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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향한 말씀] 무소유자도 소유자도 죽은 후에는....


무소유자도 소유자도 죽은 후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의 형체에게 생명의 호흡인 영을 불어 넣으셨을 때 인간은 흙도 어떤 영도 아닌 새로운 존재인 살아있는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호흡”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원재료인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게 된다.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이 말씀대로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려올라간 에녹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죽지 않고 변화되어 휴거될 사람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할 뿐 그 누구도 한번 태어나면 결국은 한번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

 
며칠 전 절에서 일평생 대부분을 중으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함과 함께 한없이 높이며 그의 삶을 칭송하고 있는데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언론들은 그가 평생을 소박하고 청렴결백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격찬해마지 않는다.

“평생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했던 법정 스님이 오늘(11일) 입적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종교를 초월해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폐암으로 투병해 오던 법정 스님이 오늘 오후 2시 입적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54년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지난 1975년부터 전남 송광사 불일암에서 17년 동안 홀로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자신이 지은 길상사로 옮겨진 직후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언론이 늘어놓은 찬사와 그의 발자취의 일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모두 다 옳고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을 두고 그 말을 되씹으면서 그의 삶을 본받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을 모아 놓은 “어록”에 담긴 내용을 보면 보편적인 상식선에서의 진리는 될지언정 역시 성경의 절대 진리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다. 그는 무소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이 말이 왜 그처럼 대단한 말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살면서 느끼는 상식적인 얘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무소유라는 말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써먹고 있을 뿐이지만, 성경은 무소유랍시고 결혼을 금하여 가족도 없고, 모든 물질을 소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어 풍성하게 가지게 될 것이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리라. 너희는 그 쓸모없는 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마 25:29,30).
 

다만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설령 네가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며 설령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육신에 고통이 있게 되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또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것같이 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같이 하며 또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은 것같이 하라. 그리고 이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다 이용하지 못할 것처럼 하라. 이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감이라』(고전 7:28~31).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 갚지 않은 병원비를 남들이 갚아 주어야만 했다. 무소유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무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도 식대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물질을 충분히 확보했고 죽은 후에 남에게 뒤치다꺼리를 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던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나는 너희가 보낸 것을 에파프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하게 되었노라. 이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요,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빌 4:18).

 
또한 그는 마음을 비울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과는 정반대의 말로 사람들을 미혹해 왔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물소리 바람소리' 중)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의 상태는 마귀의 영향 아래 있기에 악령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비워두면 마귀가 그 자리를 점유하게 되고 그 사람은 악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단장되었더라. 그러자 그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려와서 들어가 거기서 사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악화되었더라』   

(눅 11:24~26).

 
마지막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질문에서도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에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만일에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일평생을 시간을 허비하며 살다가 죽는다면 그가 갔던 곳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자연인으로서 자연인들에게 올바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그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해놓고 답변은 주지 못했던 소크라테스와 같이 정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따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과 사망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막연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죽음은 영과 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몸은 누구라도 죽으면 무덤, 즉 흙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도다』(전 3:20).

『모든 육체는 함께 멸망하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욥 34:15).

 
그러나 영과 혼은 비물질이기에 결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므로 가는 곳이 육체가 가는 무덤이 아니다. 사람의 호흡이 멈추면 영은 그 몸에서 빠져나와 그것(생명의 호흡)을 주셨던 하나님께 회수되고 혼 역시 구원 여부에 따라서 지옥이나 낙원으로 가게 된다.

 
『그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죽음에 관한 어떤 말에도 점수를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입적(入寂)이라는 불교용어를 쓰는데, 그것은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다.”라는 뜻을 지녔으며, 바로 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들은 다양한데 열반(涅槃))은 도를 완전히 깨우치고 모든 중고와 번뇌가 끊어진 해탈의 경지에 들었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적멸(寂滅), 귀적(歸寂) 입멸(入滅) 등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불타오르는 듯한 고뇌, 번뇌의 불을 꺼버리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달음을 완성한 단계로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견해를 앞세워 죽음을 미화하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노력을 해도 죄인은 죽어서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라는 사실은 결 코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죽으면 무소유자든지 소유자든지 지옥 아니면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시 9:17).

박재권 / 캐나다 주재 기자    
출처 : 바이블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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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생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말씀 : 벧후 1:1-11

올림픽 경기 제밋게 보고 보시나요?   지난시간 우리들도 올림픽 선수들처럼 인생을 경주 선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핑검사에 걸려 출전 정지를 당하고 메달을 탔어도 박탈되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뜻하신 법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는 심판 날에 주님의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의 뜻이 뭣이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에서 틀어지면 모래위에 탑 쌓은 것 같이 잘못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기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믿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여러분 나름대로 인생이란 뭣과 같은 것이라며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사람들일지라도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남들처럼 사는 거지 인생이 별거냐 하면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는 시간임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이미 갓난아이란 출발지를 떠나 여기까지를 달려왔다. 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야들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란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생이란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배가 항해를 떠나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고 시합이 시작되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정한 시간이 오면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출발이 있고 골인지점이 있고 마감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인류전체에게 ‘스톱, 이젠 끝났다. 지금부터는 심판의 시간이다.’라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최후 심판은 엄정하고 공평해서 천국과 지옥을 나누며 천국 갈 자중에서도 상급이 다르며, 지옥 갈 자중에서도 형벌이 다를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들라면 히브리서 9장 27절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꼭 알아야 할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놨습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했는가? 그 이유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였다고 창세기 1장에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2장에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의 한계를 말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첫 인류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하고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법을 어겼을 때 어떻게 되었지요? 첫째 범법자가 되어 버렸고 범법자에게 따르는 죄악의 값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맛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을 싸우고 있고, 병들고 늙고  약해져 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하나님과는 단절되고 죄악을 다스리는 자 악한 마귀가 그 인생을 장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고 계속 죄를 지면 악한 마귀와 함께 영영 지옥 불에 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에게는 죄를 없이 해주시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행복했던 에덴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니 그보다 더 귀한 자리를 주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에서는 죄 범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는 올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가인은 자기 맘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은총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그 마음을 장악한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만 되는 지를 말하고 있으며, 6장에서는 홍수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노아에게는 심판에서 피할 길이 있음과 비록 하나님의 아들들일지라고 자기들 보기에 좋다고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치도 않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0장은 세계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 를 보여 주고 있고 11장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나라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고 있고 12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아브라함이란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출애급기부터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과 세상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인류의 마지막은 어떻게 마감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구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해야만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려고 창조했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을 하신 뒤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과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우리 사람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모든 인류들이 저지른 죄- 그 죄란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섬기지도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제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신 형벌의 죽음이란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죄를 면제 받으며 원래 신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려고 창조했던 신분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되고 믿어야 되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목적과 마귀 때문에 죄에 빠져 범법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을 알아야 만이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뭣인지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하나님아버지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어떤 것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6장 40절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아버지의 뜻은 예수가 누군지를 알고 믿어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영생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육신만이 전부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불행한 사람들이요 안타까운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법을 어기면 얼마나 불행에 빠지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를 받고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신분이 회복이 되었으니 이제는 예수님 말씀대로 법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요? )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만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에서 영광된 자가 되며 기업을 얻을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하나만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서 복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8가지 심령의 상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장은 비유를 말씀한다고 해서 비유-장이라고 하는데 어떤 자들이 천국에서 복된 자들임을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장 25장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영광의 자리를 얻을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가르친 것대로 살면 주님께서 함께 할 것이고 주님께서 오셔서 시작할 나라, 하나님나라에서 복된 자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지 땅에서 세상에서 잘되고 영광을 누리고 형통한 자가 된다고 하신 구절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신약 성경의 서신 서를 통해 우리 육신이 사는 것은 다가올 하나님나라, 영생의 나라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하는 기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이고’ 세상에서 부와 귀와 공명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잘못된 가르침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주시려는 복과 예수님이 오신 신약 시대의 복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법도들을 지키며 땅에서 그들에게 복 주시겠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신 약속인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와 약속한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들에게 하신 약속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자들에게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나라에서 천사들이 부러워할 복, 시들거나 쇠하지도 않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서 하나님나라 기업을 주시되 열 고을도 다섯 고을도 주시고 예수님과 같이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하시되 우리 안에 계시며 보혜사가 되셔서 어떤 일에도 평안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요한복음 14장 26에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고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함께 할 것이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전천후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먼저 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했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은사들을 주시며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렴이  없도록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교회들과 하신 약속이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은 땅에서는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떤 핍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시는 심령의 복을 주시고, 예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이 계획한 엄청난 하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할 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왕과 백성과의 약속이라고 하고, 교회와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는 약속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여러분의 왕이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운다고 할 때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도 그걸 모르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 육신적인 복, 세상 적인 복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왜 세상에 왔는지 왜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 때 번영주의, 기복주의 미국교회 영향을 받고 예수 믿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잘못되게 가르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너도 나도 예수님을 잘 되겠다고 하는 믿음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땅의 복을 구한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서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처럼 핍박 받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주님께서 자신 안에 성령님으로 함께 하심을 알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사함으로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죄의 탕감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함께 살며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엄청난 복을 받았다면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헌신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삶은 선수들이 장래에 메달을 바라보고 노력하듯이 영원히 사는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집중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이란 경주를 하는 삶과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을 받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임을 알고 피할 줄 알고 달려야 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이런 사단의 방해 공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서 정신 차려야 할 땝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성경을 읽으시되 특히 말세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많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예배에 생활에 더욱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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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말씀] 신앙의 블루오션

신앙의 블루오션 / 황규현목사님

민수기 14:1~10

[백성의 원망]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예전에 블루오션이라는 책이 큰 히트를 친 책이 있습니다. 수많은 경쟁자가 있는 레드 오션이라 한다면 경쟁자가 없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이런 논리를 가진 블루오션이라는 개척에 대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블루오션의 핵심은 차별화입니다. 보통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모두가 다 한곳만 바라보고 일등을 향해서 모두가 바라보는데 모든사람이 다 같이 일등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모두가 다 목표점이 다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사람들이 뛴다고 같이 뛰지말고 너희 나름의 밀알이 되어 하나님의 분깃대로 살아라 라는 것입닌다.
이세상에서 말하는 차별화된 블루오션이 신앙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남이 보지 않고 하지않는 신앙의 블루오션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첫째) 상황을 넘어서야 합니다.  출애굽한 민족이 정탐꾼을 보내어 보고 온 것을 듣는데 이들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왔지만 이들은 아주 상반된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른 의견은 열지파의 대표인 것입니다. 우리는 메뚜기같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지파의 사람은 상황만 보았지만 여호수와와 갈렙은 상황을 넘어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상황에만 급급하여 요동치는 모습들이 아니라 상황에서 넘어선 상황을 볼 줄 아는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상황은 바뀔지언정.... 말씀이 본질이 되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보이는 (둘째) 상황을 넘어선 상황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돠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혼돈과 고난만이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상황을 뛰어넘는 신앙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 40년 후의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를 보니  지금이 절망적이지 않고 활기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 지향적인 부름을 받았습니다. 천국가는 그날까지 ....천국이 그런곳이며.. 천국이 그런 곳이고 가려한다면 현재만 보지않고 먼 미래를 보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는 과거에 매이지도 않았고 현재에 안주하지도 않았고 먼 미래를 바라보며 달려가라 말합니다.
 이 열지파는 오직 사람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사람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는 계속해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만 보면 불가능한 땅이지만 하나님만 보면 불가능한 땅은 없고 가능한 땅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여 내 판단을 하는 경우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은 믿는자를 통해서 (세째) 하나님만을 믿으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자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도 바다 위의 배도 아무리 튼튼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결코 낙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삶을 살게 된느 것입니다.

라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여정에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푯대를 세워서 나아가는 끝까지 승리하는 그런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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