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예배설교] 풍성한 은혜의 인생

 

 

 

 

제목 : 만선(滿船) 인생

말씀 : 요21:1-6

 


1.깨달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 떠들 줄, 啄 쫄 탁, 同 같을 동, 機 기회 기자를 쓰는데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어 나올 때를 비유하여 나온 말로 때를 알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병아리는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껍질을 톡톡 두드려 어미 닭에게 껍질을 깨트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줄(?)입니다. 그러면 어미 닭은 이 신호를 듣고 병아리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 도와달라는 신호인 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해서 껍질을 톡톡 쪼아 깨트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탁(啄)입니다.

이와같이 병아리는 병아리대로 어미닭은 어미 닭대로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야하는데 이게 동기(同機同)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너무 늦게 행동하면 자칫하면 병아리는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원리는 비단 병아리가 부화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깨닫기만하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행동하는 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행동하고자 해도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아야 하고 나아가 적절한 시기에 행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줄탁동기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으면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고, 또한 깨닫기는 깨달아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따라 행동할 때에 비로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의 도, 생명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자기 생각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뭔가 좀 알 것 같은 데 조금 지나면 그만 말씀의 의미를 다 까먹고 그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 말씀대로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자 저분에게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 다 떠나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며, 육신의 떡을 걱정하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막8:17절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어찌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동안 그만큼 너희들과 함께 하며 너희에게 말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만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내가 생명의 주임을 너희에게 분명히 보여주었건만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먹을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느냐고 하시면서 영적인 감각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선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 심령의 문을 톡톡 두리면서 잽싸게 응답하여 그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정말 주님과 주님의 뜻과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총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함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나아가서는 그 아는 지식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삶이 하나 되고, 믿음과 행동이 하나 되고,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안타깝게도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자기마음대로 엉뚱한 일을 하다가 참혹한 실패를 당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러니까 어부출신으로 갈릴리 바닷가에 잔뼈가 굵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여러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피라미 한마디로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숨어 있는 방에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자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셨겠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제자들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했습니다. 부흥집회를 열든지 성경사경회를 하든지 간절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열두제자 뿐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주며 이 분이 진정 메시아요, 생명의 주님이셨음을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제자격이었던 베드로가 먼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으나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때에, 기도해야 할 때에,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에 엉뚱하게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때 그 결과는 처참한 실패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 잡혀도 그렇게 안 잡힐 수가 있는지 일부러 안 잡으려고 기를 쓰고 그물을 던져도 밤새도록 던지면 다만 피라미 몇마리라도 잡힐 법한데 단 한 마리도 안 잡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로 말하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 고기잡이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라면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일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 했지만 헛 그물질이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고생만 실컷하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빈털터리였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 주님을 떠난 인생이 바로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에게 얼마나 쓰라린 실패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아갈 때는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남는 것은 처절한 실패뿐이요, 빈손 뿐이요, 빈 그물 뿐이요, 빈 배 뿐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혹시 잠시 무엇인가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돈이 남겠습니까? 권세가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뿐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렘2:1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을 버린 것과 제 맘대로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기만 많이 잡으면 거기 행복이 있고, 거기 풍성한 삶이 있는 줄 알고 죽자사자 세상의 고기만 잡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일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과 같아서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세상의 고기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기를 잡기 전에 주님께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풍성케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힘쓰며 나와 내 가정과 교회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의 사람들도 조차도 자꾸만 세상의 고기만 잡는 일에 열중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온전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일에도 세상의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정열을 세상의 고기를 잡는 일에만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것은 빈배요, 고통과 상처뿐이요, 하나님의 진노뿐인 참으로 가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로 내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 말씀따라 행동했을 때 성공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했을 때는 실패뿐이요, 반면에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 확실한 성공이 보장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6절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입니까? 밤새도록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엄청난 물고기가 잡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한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사실 왼편이냐 오른편이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며 설마하니 왼편에만 계속 그물을 던졌겠습니까? 설령 왼편에만 던졌다해도 왼편이나 오른편이 다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커다한 항공모함도 아닌 조그만 배에서 왼편 오른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의 의지를 따라 던졌을 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앞의 3절 말씀과 정 반대입니다. 주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을 때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고생 했습니다. 헛그물질을 했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허탈과와 낙심과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네 생각, 네 지식, 네 경험속에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치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나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 때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성공의 비결입니다. 말씀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어디 멀리가야 성공이 있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을 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높은 자리도 올라가야 합니다. 기왕이면 명예와 권세도 얻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더 잘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도 앞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인생이라야 진정한 성공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있는 곳 그 곳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든 직장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높은 벼슬을 하든 내 방식대로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삶에 반드시 성공이 있고, 반드시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8: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그러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자녀가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영육간에 온전한 복을 받는 성공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과 경험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대로 인생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내 힘과 지혜대로 내 마음대로 헛 그물질 하지 말고, 주님께서 던지라는 곳에 그물을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진정한 성공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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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전 예배설교] 은혜받는 신앙인의 삶

 

 

 

말씀 : 막5:25-34

제목 : 은혜받는 믿음

 

1.주님과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화나 토론을 하다보면 정말 서로 안 통할 때가 있죠? 어떤 때는 정말 작은 문젠데 서로 죽어도 자기 생각이 맞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아 갈등이 생기고 큰소리가 나오고 그래서 서로 간에 틈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치관이나 중요성이나 우선순위의 차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못난 자아 때문입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이 상대방의 뜻이나 방법을 인정해 주면 자기가 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양보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서로 끝까지 자기 주장을 하다가 상처를 주고 공동체의 힘을 빼기도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거 뭐 좀 방법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더라도 그냥 서로 받아 주고 타협하면 될텐데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그거 때문에 서로 굽히지 않고 그래서 교회일을 추진하는데도 협조하지도 않고 너 잘하면 네가 다해라 그러면서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여 대화가 잘 통하게 해야 합니다. 끝까지 자기 잣대를 고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비판만 하지 말고 겸손히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세워지고 모두가 함께 평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렇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더더욱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여 나와 주님 사이에 막힘이 없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이성과 고집을 따라 행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막혀 주님 나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면 누구 손햅니까?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뿐이지요.

 

성경에도 보면 그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보세요. 예수님이 베드로야, 내가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럽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이 땅위에서 메시야 왕국은 누가 건설합니까? 그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지요.

 

또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그래야 너희가 참 자유인이 될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본래 자유인인데 뭘 또 자유인이 된다고 하십니까? 그렇게 대답하지요.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종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국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순진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우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야 살고,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내가 살아서 움직이고, 또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와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잘 안되고 갈등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주님안에서 그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11: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죽은 지 나흘이 지났든 백일이 지났든 백년이 지났든 무슨 상관입니까? 주님이 그냥 그러라면 그러는 것이지요. 내 말을 들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상황이든 환경이든 경험이든 지식이든 이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말씀대로 하라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정말 상황, 환경, 조건 이런 거 따지지 말고 아집, 고집, 편견 이런 것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정말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 구원의 주님, 그 주님과 온전한 교제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상황이나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또한 자신의 고집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먼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순진한 믿음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이성적, 경험적 생각이나 고집이나 아집이나 이런 것 다 버리고 주님 앞에 순진하게 나아가 결국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덧입게 됩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했던 여인입니다. 이 혈루증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병이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요, 불치병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25,26절의 말씀을 보세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여인은 혈루증에 걸려 12년간 고생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하면 종합병원도 찾아가 보고, 한방병원도 찾아가보고, 민간요법도 써보고, 식이요법도 해보고, 벌침도 맞아보고 해 볼 것은 다 해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기는커녕 힘만 들고 재산만 다 탕진하고 도리어 병은 점점 중해 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이 여인의 고통은 단지 이런 육체적,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의 더 큰 고통은 주변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혈루증을 앓게 되면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됐고,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이혼사유가 되는 병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모든 게 절망이었습니다. 육체도 망가지고, 재산도 다 탕진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희망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지방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27,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절망 속에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 즉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중풍병자, 눈먼 자, 귀먹은 자, 앉은뱅이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며 그 말씀이 권세 있는 자의 말씀과 같다던 그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시는 그 예수님이 오신다고! 그렇다면 그분을 만나봐야지. 그분에게 가면 이 문제가 틀림없이 해결 될거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이까짓 병고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진리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마음이 치료받고, 육신이 치료받고, 영혼이 치료받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틀림없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됩니다. 틀림없이 해결됩니다. 육체의 문제, 마음의 문제, 물질의 문제, 영혼의 문제 다 해결됩니다. 다만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믿고 그 분께 의뢰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민11: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허튼 소리를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여러분, 말씀대로 해 보십시오. 왜 안 되겠습니까? 말씀대로 하면 다 해결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든 부자가 안되어도 행복하게 살든, 육신의 병이 다 낫든 병이 안 나아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든 다 해결됩니다. 가정의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시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되게 하시고, 해결되지 않아도 사랑과 은혜로 다 덮게 하시든 여하튼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 바랍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주님안에서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과 육신과 정신이 치료함을 받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길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믿었으면 믿음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믿으면 믿은대로 행동해야 그 믿음이 진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믿는다고 하면서 안 따라가면 그게 뭐가 믿는 거겠습니까?

오늘 27~29절까지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여인이 예수님의 옷데 손만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실제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곧 병이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과정을 잘 보세요. 이 여인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결사적으로 주님의 옷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였으면 이제는 액션을 취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전력을 다해 주님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는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을 보세요. 지금은 예수님께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31절 보세요.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즉 무언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아시고,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을때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아니 주님, 이 많은 무리가 이렇게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말이지요. 즉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 여인뿐 아니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서로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기 위하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예수님께 다가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사적으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빠져나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가만히 계셨는데도 이 여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나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을 만지기만 하면 낫는다. 그러므로 가다가 밟혀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분을 만나야 하겠다. 그분을 만져야 하겠다. 이런 각오와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전심전력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을 만진 사람이 어찌 이 여인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말씀을 들으려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그래서 서로 예수님께 가까이가기 위하여 에워싸고 밀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여인의 만짐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는 만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스쳤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인만이 주님의 옷자락 끝을 겨우 잡았을 때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왜 이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여인의 터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터치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터치했지만 그들의 터치는 무의미한 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터치는 완전한 신뢰와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확신의 터치였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믿는 터치였습니다.

좀전에 보았던 말씀, 28절 보세요.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어떻게 만졌다고요?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만졌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손이 아니라도 좋다. 이분의 발이 아니라도 좋다. 이 분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 이 분이라면, 이 분과 연결된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좋다. 그분과 연결된 지푸라기 하나라도 만져도 그분과 연결되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만졌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이런 터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정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진정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아니 주님께 연결된 지푸라기라도 잡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사적으로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곁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피상적으로 주님 곁을 맴도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녕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믿으며 그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을 때에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속에 역사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러자 결국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29절 말씀을 보세요.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 여인이 그런 믿음으로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그 순간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해 보아야 할 말씀은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부르심의 음성을 보십시오. ‘딸아...’ 그렇게 부르십니다. 여러분, 자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것과 ‘아들아...’ ‘딸아....’ 그렇게 부르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부모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이름을 부를 때도 사랑으로 부르겠지만 웬지 ‘아들아, 딸아’ 그렇게 부르면 더 정감이 있고, 더 진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바로 이 여인에게 그렇게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제는 평안할 것이다. 이제는 행복할 것이다. 이제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 여인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제는 더 이상 영적 무지의 자리에 앉아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 온전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인이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사생결단하고 주님 곁으로 왔듯이 주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오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주변에서 맴돌았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주님 곁에 맴도는 인생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님을 터치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녕 주님의 능력을 덧입으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과 어려운 것들을 이기고 주님의 평안과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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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고난주간 ::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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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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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샬롬(평안)을 누립시다

말씀 : 대하14:1~7


1.부정적인 에너지를 추방해야 합니다.

 

1995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화병을 정식으로 신경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공인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 병을 소개하면서 유독 한국 사람들이 많이 앓는 신경정신 질환으로 한국민속증후군이라고 정의하며 병명을 우리말 그대로 ‘hwa-byung’이라고 영어로 표기하며 영어로는 ‘anger syndrome’(분노증후군)이라고 번역을 하며 분노를 지나치게 억제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화병이 생기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막히고, 가슴이나 목에 뭔가 응어리가 느껴집니다. 또한 두통이나 소화불량, 불면증, 식욕부진, 만성피로 등의 신체적 이상 증상이 나타나고, 또 정신적으로는 우울증이 생기거나 짜증을 잘 내고 작은 일에도 깜짝 깜짝 놀라는 등 불안과 초조속에 살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화병을 한문으로는 불 화(火)자에 질병 병(病)자를 씁니다. 즉 가슴 속에 속에 불덩어리 같은 게 들어 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속에서 뭔가 부정적인 뜨거운 기운이 끓어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속에서 그 뜨거운 기운이 자신의 심령을 상하게 만들고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때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가슴속에 뭔가 부정적으로 끓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불이 마음속에 들어있으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과 행동이 독하게 되기 쉽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가 쉽고, 도전적이고 공격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또한 옆에 사람까지 그 부정적인 에너지가 전달되어 남까지도 부정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심령을 황폐하게 만들고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어 삶을 파괴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약3:6절에 보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음속에 불이나 독이 들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불을 꺼야 합니다. 독을 빼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불을 끌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의 불과 독을 다스리기 위하여 참선도 하고, 요가도 하고, 산에 가서 도를 닦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온전한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힘든 상황이 전개되면 곧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러면 온전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나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 평화의 주님, 위로의 주님, 능력의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셔서 불을 꺼주시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물리쳐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온전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우리 심령의 모든 어둠과 독과 화를 온전히 몰아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우리 안에 들어있는 모든 어둠과 불과 독을 물리치고 주님이 주시는 샬롬을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심령속의 모든 불과 독을 제거하고 참 평안을 누리려면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수양이나 참선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려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이런 것을 통하여 평안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상황이 변하고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심지어는 죽음앞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미술대학교에서 평안을 주제로 그림경시대회를 열었습니다. 학생들은 각기 자기 실력을 뽐내며 자기가 생각하는 평안의 모습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드디어 제한 시간이 지나 그림을 평가하는데 두 그림이 최종결선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두 그림은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 그림은 양 옆과 뒤쪽은 푸르고 아름다운 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있는 호수가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호수앞 풀밭에는 온갖 종류의 들꽃이 만발해 있고, 그 옆에서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잔한 호수가 의자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고 있는 그야말로 평화가 넘쳐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의 그림은 정반대였습니다. 바다와 큰 바위 절벽이 있는 그림이었는데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 엄청난 파도가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큰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바위 절벽위의 나무가 부러져 바다에 떠다니는 등 얼핏 보기에는 평안과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벽 사이의 바위틈에 갈매기 둥지가 있는데 그 둥지 속에는 새끼들이 엄마 품에 안겨 평안히 쉬고 있었습니다. 둥지 밖에는 그렇게도 사나운 바람과 파도가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 새끼들은 엄마 날개 밑에서 조금도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평안히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이 최우수작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첫째 그림은 평화롭기는 한데 그것은 다만 이상적인 세계일 뿐 세상에는 그런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은 세상이 비록 험하고 힘들어도 무언가 절대적인 것에 의지하면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그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는 바람 잘 날이 별로 없습니다. 조금 잔잔한가 싶다가도 언제 험한 바람과 풍랑이 일어나 평안을 빼앗아 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외적인 조건으로 평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고, 환경도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름다운 모습에서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고, 나 또한 부족하고 약하고 미련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평안을 누리려면 오직 모든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오직 모든 생명과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만이 참 생명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평안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샬롬이고, 다른 하나는 솨카트입니다. 샤카트는 한마디로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이나 사고나 천재지변이 없이 외적으로 평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에 샬롬은 외적으로 전쟁이나 기근이나 천재지변이 없는 것도 포함하지만 그보다는 내적으로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외적으로 전쟁이나 질병이나 천재지변이 없는 상태인 솨카트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이런 평안도 주십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도 나타나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비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십년 동안 평안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평안이 솨카트 즉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평화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습니까? 십년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9절에 보면 10년 후에 구스 나라가 백만대군과 병거 삼백대를 거느리고 침공해 옴으로써 이 평화는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솨카트 즉 외적인 평안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솨카트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온전치 못한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평안을 누리려면 솨카트가 아닌 샬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황이나 환경이 안정됨으로써 누리는 평안보다 내적으로 우리의 심령속의 모든 문제가 해결됨으로 누리는 평안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환경과 상황을 이기고 참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평안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의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와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마귀사탄의 역사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사탄을 쫓아내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심령속의 모든 어둠과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쫓아내고 온전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7절 상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보십시오. 내가 평안을 주겠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이 주는 것은 잠시잠깐 뿐이요,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내가 주는 평안은 영원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심령 속의 모든 어두운 것들과 부정적이고 사나운 기운들을 쫓아냄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 완전한 평화의 상태인 샬롬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 있는 이 참 평안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것도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을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주님 안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4절과 7절을 보십시오. 먼저 4절을 같이 읽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7절도 좀 길지만 같이 읽습니다.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세 번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라쉬(darash)인데 이 말은 ‘자주가다, 찾다, 구하다, 문의하다,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을 찾아가서 구하고 묻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입니다. 정녕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고 구하며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게 되었고 그 뜻을 따라 살게 되었고, 그럴 때 주의 은총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럴 때 주님 안에 있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래리 넬슨이라는 유명한 골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핸가 아주 중요한 경기를 하고 있는 데 경기가 너무 안풀려 성적이 매우 부진했습니다. 그러자 점점 마음이 불안하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그 자리에 앉아 두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1,2등을 다투며 선두 그룹을 달리던 친구가 조롱하듯 말했습니다. “어이 이봐, 친구, 하나님께 우승 트로피라도 달라고 기도하는 건가?”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아닐세. 나는 우승 트로피가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네.” 그는 이렇게 모든 욕심을 버리고 평안하게 게임에 임할 수 있도록 해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경기에 임하자 정말 마음이 평안해지고 안정적으로 게임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공이 홀 속으로 얼마나 잘 빨려 들어가는지 결국 하위권을 맴돌던 그가 그 경기에서 우승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바람을 명령하여 잠재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심령속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욕심과 독과 화를 제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께 구하면 분명히 평안을 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6절 상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누가 평안을 주셨습니까? 또 7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누가 평안을 주셨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평안을 언제 주셨습니까? 그것은 2~5절까지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아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의를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우상들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그런 것들을 깨트려 버리고, 찍어 버렸습니다. 동시에 그는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찾게 하고 율례와 명령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열왕기상 15장에 보면 그는 어머니가 우상을 섬기자 태후의 위를 폐해버리고 근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즉 아사왕이 오직 하나님을 찾으며 모든 우상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평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기에 분명히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그런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허물이 많고 미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우리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의 역사를 결박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안에는 그 어떤 어둠도 깃들 수 없습니다. 마귀 사탄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득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심령속의 모든 어둠과 독과 화를 이길 수 있는 길도 분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길 수 있는 길도 분명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강의 원출처인 예수님을 심령속에 모셔들이면 우리 심령속의 모든 화와 독과 모든 어둠의 세력들은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게 됩니다. 그러면 참 샬롬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며 오직 생명과 평안와 위로와 기쁨과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가까이하며 주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 품안에 안겨 살아갈때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내 심령속의 모든 어두운 것들과 화와 독을 내 쫓아버리고 동시에 외부적으로 다가오는 모든 어려운 현실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샬롬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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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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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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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설교]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제 목: 새사람의 새습관

 
(에베소서 4:22~24)

86년도를 마지막 보내는 주일에, 지난해가 성공의 해가 되었든, 실패의 해가 되었든 망각의 바다에 흘려 보내고 87년 새해를 잘 맞이하고 잘 보낼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 "새사람의 새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 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좇아 가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반대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옛습관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습관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1.새 사람을 입으라

헌 옷을 벗어버리듯 죄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낡은 옷 꿰매어 입듯이 사람이 노력으로 수양하고 교양을 쌓아서 새 사람이 되고 구원 받는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멸망할 옛 사람을 회개함으 로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고 예수그리스도를 옷입듯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새 생명이 되는 것이요, 새 사람이 시작되 는 것입니다.(요 1:12, 3:16, 6:47, 롬10:10등).

말씀은 생명있는 씨앗과 같아서 말씀을 들을 때 믿고 받아 들이면 옥토에 떨어진 씨 같아서 새 생명이 시작되지만, 말씀을 귀등으로 받아 넘기고 믿지 않으면 길바닥에 떨어진 씨 같 아서 새(마귀)가 와서 가로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처음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과거에 마귀의 유혹을 따라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던 옛 습관을 회개 함으로 벗어 버려야 됩니다. 또 밤송이가 영양분을 잘 빨아 들여 익으면 자연히 껍질이 벗겨지면서 탐스러운 밤톨이 쏟아지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과거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행동하는 옛 습관은 인간을 썩게 만들고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다음에는 말씀을 잘 받아먹고 은혜를 잘 받으며 회개하여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끊어 버려야 합니다. 묵은 해를 보내며 썩고 냄새나는 옛사람의 못된 습관을 벗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기 도해야 되겠습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와서 핥아 먹듯이 예수님을 몇년씩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을 때 가졌던 못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술먹은 습관, 도박, 손장난하는 습관, 춤추던 습관, 음란한 습관, 부부싸움하는 버릇, 바가지 긁는 버 릇, 거짓말하는 버릇등 썩어져가는 더러운 습관을 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나쁜 습관 한가지 때문에 임금님 진지 그릇같이 귀한 그릇이 될 사람이 강아지 밥그릇처럼 천한 그릇이 되고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서도 결단력이 있고 결심이 강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 유신 장군이 젊어서 늘 주색에 빠지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의 모친이 "치국평천하를 꿈꾸는 사람이 항상 주색에 빠져서야 어찌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눈물로 타이를 때 그는 결심하고 술집에도 기생집에도 안갔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중 말위에서 졸다 보니 어느새 영특한 말이라 전에 잘다니던 기생집 앞에 와서 멈추어 섰습니다. 이때에 눈을 든 김유신 장군은 말에서 내려 "왜 나를 이리로 데려 왔느냐?"고 호통을 치고 긴 칼을 뽑아 그 애마의 목을 쳐서 떨어 뜨리고 뚜벅 뚜벅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는 설교도 잘하고 똑똑한데 말버릇이 나빠서 늘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다가 어느 낙도 작은 교회에 가서 자기의 입 버릇을 고치려고 밤톨만한 조약돌을 주어서 입에 물고 3년동? 안을 지내고서 말 버릇을 고치고, 환영받는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패배자가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받을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묵은 해와 더불어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육신 의 정욕대로 행하던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2.새 사람의 새 습관을 가지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다운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신 말씀대로 옛 사람의 습관은 십자가에 못박고 새 사람의 습관을 가지고 살 아야 되겠습니다.

1)모든 예배에 출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갈까 말까 망설이고 유혹받는 정도의 신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일날 친구가 등산가자, 낚시가자, 유혹을 받을 정도가 되면 안됩니다. 감히 그런말도 못 꺼내게 엄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밤 예 배시간에 세계복싱 타이틀 매치를 한다고 해도 탁 꺼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가져야지, 무슨일이 있을때마다 곶감 빼 먹듯 하면 아직 좋은 신자 되기는 늘린것입니다. 특히 일주일의 7분의 1, 그 하루는 주님의 날로 성별해 바쳐야 그 가정, 그 나라에 평강과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서 58장 13절, 14절에서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을 행치 아니하며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토요일은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주의 제단에 집을 짓고 보는 참새 와 제비도 부러워하면서 "주의 집에 거하는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고 했고 "주의 궁정(교회)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하면서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눈물 골짜기로 다니며 슬픔과 고통을 만나도 때를 따라 위로의 샘물을 얻게 하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주일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도 열심히 출석하여 T.V앞에서 시간보내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종교가 그렇게 부패했는데도 규례를 따라 꼭 꼭 성전에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것은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다른 헌금은 올바른 헌금이라고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박사가 설교하는 중에 "오늘날 미국 사람의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 대한 채무 이행을 기피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7장 30절) 마당히 갚아야 할 빚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강도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간신히 구원 받았으니 십일조를 여생, 구원에 갖다 부치지는 않습니다마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리우는 리차드 윔브랜드(Richard Wurmbrand)라는 사람은 공산치하에서 그 극 심한 고문을 받으며 감옥 생활를 할 때에도 일주일에 빵 한덩어리씩 주는 것과 매일 더러운 국한그릇씩 주는 것을 받아서 십의 하나씩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더 약한 형제에게 주며 십일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맨솔래덤(mentholatum)의 주인공 알버트 하이드(Albert H yde)씨는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심한 다음 언손에 바르는 약 맨솔래덤을 발명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하나님이 삽으로 떠 넣어주면 반드시 잊지않고 하나님께 떠서 바치곤 했는데 마침 내 하나님께 가장 많이 바치는 신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YMCA에 수백만불을(당시 돈 으로)내 놓았고 일본에서 버는 돈만 가지고 일본 선교사업비 전부를 부담할 수가 있었고 그가 87세에 죽을 때는 150만불(현 150억도 넘는 액수)를 선교사업에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로 축복받은 윌리암 콜게이트(William Colagate)는 16세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을 떠나가 다가 전에 알던 선장노인을 마나서 돈을 벌려고 뉴욕으로 가는데 자기는 비누와 양초 만드는 기술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선장노인은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나서 충고하기를 "언제인가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비누업자(maker)가 생겨날 것이다. 그 사람은 다 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네가 될 수도 있다. 부디 착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께 네 마음을 바쳐라. 그리고 네 소유에서 주님의 것을 꼭 돌려 드려라. 또 정량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비누를 만들어라. 그러면 분명히 너는 번영하고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을 때 콜게이트(Colgate)는 말을 명심하고 교회 생활을 철저히 하며 십일조를 잘 드렸습니다. 처음 1달러를 벌었을때 10센트를 드리고, 점점 축복을 받아 정식 사원이 되고 동업자가 되고 결국 자기의 회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10의 5조까지 드리다가 최후에는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수억만달러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록펠러(Fockefeller)는 어려서 어머니를 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는데 첫 월급으로 주금 1불 50센트를 받아 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그중에 10분의 1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잘살게 된 다고 말씀할때 꼭꼭 하기 시작하여 엄청난 재벌이 되었는데, 부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꼭 가르쳐서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독자들에게 일러 달라는 부탁을 하더랍니다. 십일조를 안해도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지 못하며 언제 날아 갈지도 모릅니 다. 자자 손손 축복받는 재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외에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간증자들이 있는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 가운데 다른 곳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무서운 죄가 된다고 했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한데가 없습니다. 오직 말라기 3장 10절에만 시 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여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바칠때 마다 이럴까 저럴까 시험을 받으면 아직 하나님께서 마음놓고 축복하실 수가 없고 의례히 무슨 수입이나 크건 작건 생길때마다 하나님의 것을 아까운 마음없이 바치도록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습관은 복 받는 습관입니다.

3)하나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대화란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것인데 매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의논하는 것과, 매일 단 두장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그속에서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꼭 찾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 영의 양식을 반드시 먹는 습관을 가졍야 합니다. 기도가 아침의 열쇠가 되어야 하고 저녁의 자물쇠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무슨 문제나 기도로 해결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목숨걸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승리했습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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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사랑의 우선 순위

 

 

 

말씀 : 신6:4~9

제목 : 사랑의 우선순위

1.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부모의 자녀 사랑,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인간의 동식물에 대한 사랑 등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름답고 가치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동물에 대한 사랑이 모두 가치있고 귀한 것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인 것이고, 더 큰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도 부모님께 대한 사랑이 친구에 대한 사랑보다는 더 우선적이고, 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만약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구와 애완견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우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분명 귀중함이나 가치에는 차이가 있고 그래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어떤 바보같은 사람들이 개 사랑하기를 사람보다 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친 중년부인이 남편없이는 살아도 개 없이는 못산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개에게 온갖 정성과 시간과 돈을 쳐 들이고 심지어는 개한테 엄마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말을 합니다. 자기가 개 엄마면 그러면 자기도 갭니까? 심지어는 개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돈 만원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개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개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거 아닙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가장 가치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눅14: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보십시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을 미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그 어떤 소중한 것이라해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부귀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개 따위는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부모나 친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우선 되어야 합니다. 마22:37~3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무엇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 이웃 그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먼저 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물론 모든 것을 사랑하되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가장 크게 사랑해야 마땅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해야 합니까?

2.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순위에 두고 사랑하며 섬겨야 될 이유는 앞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지만 그 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함게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왜 그래야 하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 전제조건이며 이유이며 근거인 것입니다.

4절에서 우리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 하나님, 여호와, 유일하신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신이라는 뜻으로 전능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 있다는 것은 존재의 근거가 타인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은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유일하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구원자이신데 그 분보다 소중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분보다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이겠으며, 그분보다 더 믿고 섬기고 공경하고 의지하고 따라가야 존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최우선적으로 그 분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섬기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생명과 위로와 소망과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3.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5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고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전인격 즉 모든 영성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남편도 사랑하고 다른 남자도 사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24절에서는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진정하고 완전하고 유일한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뜻이란 원어로 ‘영혼, 생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뜻을 다한다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2: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더더구나 죄로 말임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라고 하면 언제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0:39절에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힘을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육체의 힘입니다.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적든 크든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재능의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어떤 이는 미술을 잘하고, 어떤 이는 음악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리더십이 있습니다. 또 권력과 물질의 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가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습니다. 이것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그 모든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동원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모든 힘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할 때에 그 힘이 자신과 남들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세상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복된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또한 그런 믿음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은혜로 성령으로 기쁨으로 평강으로 사랑으로 백배천배만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4.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아직도 죄와 무지속에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이 어차피 잘 안되는 것 공연히 속 끓이지 말고 포기하자 하면서 포기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십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나는 무지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15:5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함께 하시면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주셔서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물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모두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사랑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사랑입니다.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길이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까지 당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되 반은 세상을 사랑하고, 나와 내 가족과 내가 즐겨하던 것을 먼저 사랑하고 그 나머지 찌끄레기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려서 정말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랍고 풍성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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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

 

 

 

제목 :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

말씀 : 눅18:9-14

1.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1861년부터 65년까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북부지역은 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남쪽에는 농없이 주업으로 노예제도가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천명하자 이에 반발한 남부 사람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별도의 대통령을 뽑으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되어 4년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승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민주정치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4년간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군이나 북군이나 모두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북군에 속한 교회의 목사님들과 교인들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되어 주셔서 북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한 남군에 속한 교회는 교회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남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난감하셨겠습니까? 양쪽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싸우며 죽고 죽이고 하면서 서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하니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이때 링컨 대통령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전에 먼저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그 뜻대로 행하고 그 뜻대로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정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달라고 하기 전에 나는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편에서 생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서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별로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서 다른 교인이나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교회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비판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그다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누구 때문에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교인들과 교회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편에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라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우리를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오실 때에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해야 하고, 영접하였으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그대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라야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달라고 하기 전에 주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부르심과 사랑에 응답하여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나 성도나 기타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내 스스로가 주님편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며 그래서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교회도 열심히 섬겨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총을 세상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주님편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두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어디에 갔습니까? 성전에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은 교만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물리침을 당하고, 겸손히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것이 내가 주님의 편에 서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엡1: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충만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물론 주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고전12:27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주님의 몸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데 지체인 우리가 어떻게 몸된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또한 교회는 주님으로 충만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지상 교회가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상에서는 주님으로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으로 충만한 교회를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 편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요15: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보십시오. 주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고 나아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꼭 교회에 다녀야 신앙생활하나? 혼자하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를 안다니며 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100%틀린 생각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치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 없습니다.

물론 정말 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나아가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몸된 교회를 뗘나서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주님으로 충만한 교회를 떠나서 은혜충만한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부모님을 멀리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허물이나 들추고 다니면서 부모님을 공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멀리하고, 대화도 하지 않고, 요구를 거부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이기를 힘쓰라, 주일을 성수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하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면서 하나님 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와 성도들을 비난하고 비평하기 전에 내가 먼저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다면 열심히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두 번째는 주님 앞에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11,12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드렸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사실 감사한 것 아닙니까? 못된 짓 안하고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하고 얼마나 그럴듯한 삶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한마디로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의를 내세우며 남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즉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를 지칭하며 나는 저 나쁜 사람, 저 죄인과 같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즉 이 사람은 교만하고 무지하고 남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3절 보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를 생각할 때에 감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멀리 서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생각할 때 너무 죄스럽고 너무 송구스러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왜 가슴을 칩니까? 너무 슬프고 답답하여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아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생각할 때에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아파서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하며 죄사함 은총을 간절히 탄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기도를 주셔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는 겸손히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진실로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미련한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심히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나와서 진실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 미련합니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저를 도와주소서하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죄나 허물이나 부족한 것을 보고 비난하고 헐뜯음으로 남의 가슴을 치게 만들지 말고 겸손히 자기 가슴을 치며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힌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14절 하반절을 보세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다시 말씀드려 바리새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외적으로는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더 깨끗하고, 종교생활도 잘 했을지 모릅니다. 세리는 외적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죄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 죄는 말하지 않고 그 쥐꼬리만한 의를 내세웠습니다. 자신의 죄는 모른 채 세리를 경멸하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비록 외적으로 허물이 많았지만 자신의 죄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겸손히 엎드려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과학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지식이나 제법 뭐 좀 이루었다고 교만에 빠져 하나님까지도 제멋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자기 눈속에 들보가 있는 줄은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은 깔아 뭉기고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첫째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요 동시에 결국 인간 사이에 갈등과 아픔과 고통을 주는 미련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물리침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147: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 둘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이란 주님의 낮아지심과 사랑을 기억하며 그 주님이 우리 심령가운데 온전히 임하시도록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나아가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을 보내면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달라고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정말로 하나님 편이 되어 은혜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허물을 인정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 편이 되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 되어 주실 때에 하나님안에 있는 그 놀라운 은총을 충만히 받아 누리고, 더 나아가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과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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