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

 

 

 


말씀 : 엡 3:14-19

제목 :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

 

1.선한 싸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 소녀가 큰 사고를 당하여 양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여러 번의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하여 이 소녀는 수술을 받고 물리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 차례하는 동안 이 어린 소녀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부모님에게 이제 그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물론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얘야, 안된다. 힘들어도 참아야한다. 지금 잘 견뎌야 나중에 걸을 수도 있고, 그래야 생활하는데 힘들지 않단다.’하면서 달랬습니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다리를 못쓰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실 거잖아요? 그러니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하면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린 딸을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다리를 못쓰게 되어도 아니 설령 네 온몸을 못쓰게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이 고통의 시간들과 싸워 이겨서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바란단다. 왜냐하면 그래야 네 인생이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워 질 것이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소녀는 일년여 동안의 긴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고 성한 몸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아니 아예 바보가 된다고 할지라도, 또 심지어는 죄가운데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가 어떤 고난이나 죄악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에 지거나 혹은 어떤 어둠의 세력에 억눌려 초라한 인생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선한 싸움을 잘 싸워 더 아름답게, 더 거룩하게, 더 온전하게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과 시험과 유혹이 오더라도 그것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장은 조금 편하고 쉬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 영혼이 유린당하여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고 종노릇하며 결국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나 의미도,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과 자유와 평화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세상의 고난과 시험과 유혹과 핍박과 죄악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울 때 비록 그 과정이 조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누려야 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다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4:7,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조금 힘들다고 세상의 죄와 유혹에 적당히 타협하며 양보하며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죄의 유혹과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유혹과 왜곡된 가치들과 맞서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안에 온전한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채울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서 세상의 모든 고난과 시험과 죄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무엇으로 모든 고난과 죄와 악을 이기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가능하겟습니까?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강한 것 같지 심히 약한 존재입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죄와 무지를 깨달아 알 수 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무엇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느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부요함이나 세상의 명예나 세상적인 어떤 축복이나 건강이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와 선과 은혜와 사랑 등의 선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한 가치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죄와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따라서 다른 것들 즉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이 아무리 풍성해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이라는 그릇 속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요, 마귀가 들어있으면 마귀의 사람입니다. 진리가 들어 있으면 진리의 사람이요, 거짓이 들어있으면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 있다면 은혜의 사람이요, 악과 거짓과 추함이 가득 들어 있으면 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축복의 사람이요, 원망과 미움과 저주가 가득 들어 있으면 저주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는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가 가득 들어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모든 죄와 유혹과 어둠을 이기고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은혜가운데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정말 은혜와 진리와 생명의 풍성함 가운데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것들로 우리를 채우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세상의 죄와 악과 어둠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여 진정한 평안이나 행복이나 은혜를 누릴 수 없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도 누리기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무엇을 위하여 힘쓰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복된 삶을 살려면 무엇을 먼저 채워야 합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육신도 건강해야 합니다. 지식과 교양도 쌓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도 얻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판사 의사 목사가 되기 전에 하여튼 외형적으로 무언가 그럴듯한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격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올바른 인성을 가진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기에다가 올바른 영성을 플러스해야 합니다. 아니 인성보다 영성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성만 좋으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영혼이 죽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갖춘 사람이 온전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누려야 할 영적 육적 물적 지적 정적 모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믿음과 사랑과 은혜과 진리와 거룩과 의와 선과 지혜로 충만함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영성과 이성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정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크고 높고 깊은 것인가를 알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한없이 크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물론 모든 인류, 모든 우주 공간에 미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길이는 어떻습니까? 그 길이는 무한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무한한 것이지요. 또 그 깊이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의 깊이는 바다 밑바닥까지, 지구 깊은 곳까지 모든 곳에 미치는 것입니다. 높이는 어떻습니까? 그 높이는 하늘 끝에까지 닿는 숭고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인류에 미치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집니까? 그야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어떻게 우리는 사랑하셨는지를 안다면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 가운데 차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그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 겸손히 엎드려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말씀묵상할 때 어찌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래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때에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그 감격의 눈물과 함께 세상의 모든 원망 불평 짜증 미움 저주 불신 어두운 것 더러운 것 다 독기 시기 질투 이런 모든 찌꺼기들도 다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속에 천국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빛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사랑과 감사가 넘쳐흐르는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릴 때 더욱 은혜의 충만함을 입어 우리 가운에 남아 있는 모든 찌끼 같은 것들을 다 쏟아내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17,18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온전히 모심으로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그리고 그의 사랑도 올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한 거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비로소 우리의 어둠과 무지는 물러가게 됩니다. 사단은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 속에 빛과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영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사탄의 영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죄와 어둠의 그림자도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게 하시고, 따르게 하시고, 생명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까짓 알량한 내 고집, 생각, 이성, 가치관, 주장, 경험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완전히 주장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에 완전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니까 빛이시니까 은혜이시니까 능력이시니까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끄떡없이 서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물결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내 작은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를 따라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약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기고 생명력이 넘치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승리의 사람, 능력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식도 건강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와 빛과 기쁨과 평강와 위로와 소망 등의 온갖 좋은 것들로 여러분의 심령이 가득채움 받아서 진정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어두운 것과 힘든 것과 죄의 유혹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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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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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지혜로운 인생

 

 


제목 : 지혜로운 인생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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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잘못된 신앙관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잘못된 신앙관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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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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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역예배 말씀]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믿음

-오늘의 말씀-
찬송 :
기도 : 임 ㅇ ㅇ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11
마 8:5-13/ 히 11:1-3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독일에서는 고학생들 중에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받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고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환경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그 해석에 따라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두려움의 눈으로 보면 자신을 파멸하게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자신을 값지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성령 받으며(갈 3:2),믿음으로 능력을 받습니다(막 9:23).
그리고 믿음으로 영생을 받고 천국에 갑니다.
믿음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의지 할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믿어지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환상으로 우리 마음의 심상에 그려집니다.
즉 믿음은 영적 환상으로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여 지는 것을 의지를 다하여 순종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은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심상에 바라는 것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증거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게 된 것은 논리적, 물리적,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환상으로 본 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18-20)
아브라함은 이삭을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본문의 백부장도 믿음으로 하인의 병을 고침 받는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환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성령이 주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마 8:5)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그는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하찮은 하인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 할 만큼 믿음의 사람입니다.
기도 하면 믿음은 성령과 연결 되어 환상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 앞에 나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과 더블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 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죽은 자를 살릴 뿐만 아니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이땅에 풀뿌리 하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모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께서 이 사건의 주관자 이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만이 아닌 육신적인  필요를 느낄 때에도 주님을 나의 공급자로 인정하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만왕의 왕 구세주를 영접한 주님의 자녀로서 왕 같은 제사장의 영성으로 내 가정과, 이웃과, 섬기는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보람 된 목적이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 주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9)
백부장은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신 전지전능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주님을 믿을 때 말씀을 통해 환상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얼마나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가에 따라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믿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약하다든지 믿음의 순수성이 없을 때는 기적은 체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여   꿈꾸는 것들이 기적으로 나타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주관적으로 올 때 순종하면 환상은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7-8)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너희는 이것을 명하고 가르치라"(딤전4:11)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전념하라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받고 깨달은 것을 나를 세웠던 말씀들이 만물에게 까지 잘 흘러가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들이 형용하기 힘든 자극적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선택해야할 습관이나 , 사람, 환경의 기준들이 나를 지키기에 힘들게 하는 시대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가 필요합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우리의 내면을 형성 하기 때문에 영적 건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고 내가 배우고 익히고 체험한 신앙을 이웃과 후손에게 이르도록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실천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형통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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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낮예배설교-사랑의 우선 순위

말씀 : 신6:4~9

제목 : 사랑의 우선순위

1.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부모의 자녀 사랑,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인간의 동식물에 대한 사랑 등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름답고 가치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동물에 대한 사랑이 모두 가치있고 귀한 것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인 것이고, 더 큰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도 부모님께 대한 사랑이 친구에 대한 사랑보다는 더 우선적이고, 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만약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구와 애완견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우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분명 귀중함이나 가치에는 차이가 있고 그래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어떤 바보같은 사람들이 개 사랑하기를 사람보다 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친 중년부인이 남편없이는 살아도 개 없이는 못산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개에게 온갖 정성과 시간과 돈을 쳐 들이고 심지어는 개한테 엄마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말을 합니다. 자기가 개 엄마면 그러면 자기도 갭니까? 심지어는 개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돈 만원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개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개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거 아닙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가장 가치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눅14: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보십시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을 미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그 어떤 소중한 것이라해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부귀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개 따위는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부모나 친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우선 되어야 합니다. 마22:37~3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무엇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 이웃 그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먼저 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물론 모든 것을 사랑하되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가장 크게 사랑해야 마땅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해야 합니까?

2.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순위에 두고 사랑하며 섬겨야 될 이유는 앞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지만 그 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함게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왜 그래야 하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 전제조건이며 이유이며 근거인 것입니다.

4절에서 우리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 하나님, 여호와, 유일하신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신이라는 뜻으로 전능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 있다는 것은 존재의 근거가 타인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은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유일하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구원자이신데 그 분보다 소중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분보다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이겠으며, 그분보다 더 믿고 섬기고 공경하고 의지하고 따라가야 존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최우선적으로 그 분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섬기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생명과 위로와 소망과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3.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5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고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전인격 즉 모든 영성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남편도 사랑하고 다른 남자도 사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24절에서는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진정하고 완전하고 유일한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뜻이란 원어로 ‘영혼, 생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뜻을 다한다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2: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더더구나 죄로 말임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라고 하면 언제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0:39절에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힘을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육체의 힘입니다.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적든 크든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재능의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어떤 이는 미술을 잘하고, 어떤 이는 음악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리더십이 있습니다. 또 권력과 물질의 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가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습니다. 이것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그 모든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동원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모든 힘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할 때에 그 힘이 자신과 남들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세상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복된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또한 그런 믿음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은혜로 성령으로 기쁨으로 평강으로 사랑으로 백배천배만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4.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아직도 죄와 무지속에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이 어차피 잘 안되는 것 공연히 속 끓이지 말고 포기하자 하면서 포기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십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나는 무지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15:5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함께 하시면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주셔서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물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모두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사랑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사랑입니다.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길이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까지 당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되 반은 세상을 사랑하고, 나와 내 가족과 내가 즐겨하던 것을 먼저 사랑하고 그 나머지 찌끄레기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려서 정말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랍고 풍성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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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복된 선택

말씀 : 창13:5~13

1.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커다란 황금 돼지가 “꿀꿀꿀꿀”하면서 자기 집으로 들어오더랍니다. 너무 귀한 꿈같아 점쟁이를 찾아가 이야기를 하니까 점쟁이가 당신 집에 노다지가 굴러 들어오는 꿈이니까 로또 복권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부정 타니까 로또 복권 10장을 사서 부적을 하나 구입하여 그 부적으로 복권을 싸되 부적도 싼 것은 별로 효력이 없으니 비싼 것으로 사서 복권을 싼 다음에 절대로 다른 곳에 보관하지 말고 몸 속 깊이 잘 간직하고 가능하면 아무하고도 만나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 말을 못하여 답답하거나 가족이 말을 시키면 그저 ‘꿀꿀꿀꿀’하고 대답을 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로또복권 10장과 거금 50만원을 들여 부적을 사서 복권을 부적으로 싼 다음 품속에 깊이 감추고 부정탈까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아내가 이상해서 왜 그러느냐고 아무리 말해도 대답하지 않더니 자꾸 물으니까 “꿀꿀꿀꿀” 그랬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깜짝 놀라서 아이쿠 돼지귀신이 붙었구나 하면서 무당을 불러 왔습니다. 무당은 남편을 보자 할아버지 귀신, 증조할아버지 귀신, 고조할아버지 귀신 등 세 조상 귀신이 붙어서 보통 굿 가지고는 안 되고 최소한 천만 원짜리 정도의 굿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은 속이 답답해서 또 ‘꿀꿀꿀꿀’ 그랬고 그러자 아내는 야, 이거 정말 센 귀신이 붙었구나 하고는 천만 원을 들여 굿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라 또 ‘꿀꿀꿀꿀’하자 무당이 이건 너무 센 귀신이 붙어서 천만원짜리 굿 갖고도 안 되겠다고 하면서 이천만원짜리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을 더욱 속이 터져 ‘꿀꿀꿀꿀’ 소리쳤고, 그러자 아내는 더욱 걱정이 되어 결국 이천만원짜리 굿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천만원짜리 굿을 하는 날이 바로 로또 복권 당첨 숫자를 발표하는 날이어서 남편은 굿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스마트폰으로 로또 복권 당첨번호를 확인을 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열장 모두 꽝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남편이 입을 열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여편네야, 네가 굿판을 벌이니까 될 일도 안 되잖아!”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무당이 “봐라. 굿을 해서 드디어 조상귀신이 물러가서 말 문이 열렸지!”하고 소리치더니 잽싸게 짐을 챙겨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웃기는 이야기지만 정말 얼마나 미련하고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입니까? 돼지꿈을 꿨다고 복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고 무당이 복권과 부적을 사란다고 사는 사람이나 또 굿을 하란다고 굿을 하는 사람이나 이걸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먹는 무당이나 모두가 죄와 무지속에 있는 미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생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돼지꿈이 복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고, 돼지코에 돈 끼워놓고 고사를 지낸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니고, 부적을 집에 붙여 놓고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니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한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 행위들은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이 마귀사탄에 종노릇하는 미련하고 불쌍하고 이리석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복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인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을 주고, 자신도 영육간 복을 정말 진정한 복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믿음 안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육 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눈앞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택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복된 삶을 살려면 눈 앞에 보이는 당장의 유익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편을 택하고 그 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맡아 기르던 조차 롯이 장성하여 기업을 이룬 다음에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며 어디로 가든 네가 좋은 곳을 택하여 떠나라고 하자 롯이 요단 들을 선택하여 떠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땅에 머물게 된 직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롯은 단순히 육체적인 안목으로 사람의 눈에 보기에 좋은 곳을 택하여 가서 거기에 삶의 터전을 잡았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결국 하나님 편을 택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점점 소돔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뭔가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 롯이 처음부터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롯이 택한 곳은 요단 들입니다. 거기는 목축하기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네가 먼저 택하라고 하니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사람보기에 좋은 요단들을 택했습니다. 즉 그는 그 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나 아브람의 은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판단의 근거는 육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어디까지 갔다는 것입니까? 소돔까지. 소돔이 어떤 땅입니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땅입니다. 온갖 음란과 향락과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땅입니다. 오죽하면 소도미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소도미는 남색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하나님의 뜻이나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는 없이 그저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그저 자기의 유익을 따라 갔다을 때 결국 죄악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완전히 쫄딱 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에 그들이 가지고 갔던 모든 재산들도 몽땅 불태워 없어지고 겨우 몸만 빠져 나왔는데 그나마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어 죽고 롯과 두 딸 사이에는 근친상간이 이루어져 가장 치욕적인 민족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 보기에는 좋은 땅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렀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말씀대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번성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때 뿐 만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편을 택했던 사람입니다. 창12장에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 편을 택하고 떠납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고 결단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곳을 떠나는 것은 부모형제나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그곳에서 닦아 놓은 모든 생활기반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저 이방 땅에 가서 생명의 안전에 대한 보장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다 버리고 가라고 하시면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것도 보여주지도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덮어놓고 가라고 하면 도대체 뭘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 편을 택하고 묵묵히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조건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무조건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라면 그냥 고이 달라고 하시지 왜 하필이면 잡아서 각을 떠서 불에 태워서 달라고 하십니까? 그것도 후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달랑 줘놓고 죽여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니 무슨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경우고 이유고 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성이니 경험이니 논리니 이런 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그러라면 그런 줄 알고 말씀 편을 택하고 시키는대로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롯은 반대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이나 이런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길러준 큰아버지의 은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갔습니다. 그래서 롯은 쫄딱 망했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영적 물질적 축복을 놀랍게 받아 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말씀 편을 택해야 합니다. 주일에 아무리 바빠도 일터를 선택하지 말고 교회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녀와 하나님 중에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십일조냐 자녀 교육비냐가 고민될 때도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월급 많은 곳이냐 주일성수 잘 할 수 있는 곳이냐할때도 마땅히 주일성수 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쁘고 멋있고 능력있는 배우자냐, 그렇지는 못해도 신앙생활 신실하게 하는 배우자냐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신앙생활 신실하게 할 수 있는 배우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밖에 모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론 최상의 선택이요, 최고의 가치요,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부호 록펠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과 주일성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거부가 되기 전에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하여 금광을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금광은 금을 캐낼 만큼 거의 다 캐낸 얼마 안 있어 폐광을 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속아서 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투자금을 몽땅 날리고 광부들은 밀린 임금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십일조 한번 떼어 먹지 않고 꼬박꼬박 드리고 주일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만나게 하십니까?

이렇게 통곡하며 기도를 하는데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록펠러야, 때가 되면 거둘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더 깊이 파거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동안 땅을 파내려 갔을 때 갑자기 누런 황금 대신 시커먼 물이 분수처럼 솟구쳤습니다. 그건 물이 아니라 원유였습니다. 조사결과 거기에는 엄청난 원유가 매장되어 있었고, 결국 록펠러는 이 일로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편을 택할 때에 분명히 최상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을 택하고 진리를 택하는 지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이 택해야 할 최상의 선택이며 최고의 선택임을 믿고 말씀 편을 택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 속에 최상의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보다 화평을 선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물질적 유익보다 사람을 배려하며 평화를 선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9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말씀 앞 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둘 다 가축 떼가 많음으로 서로 가축을 먹이기에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우리는 서로 친족이다. 다투면 안 된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좋은 곳을 택하여 가라. 그러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겠다. 네 영역을 침범하기 않겠다 롯에게 양보하고 조카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한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아브라함이 어른이고, 롯을 길러주어 이렇게 어엿한 한 가문을 이루게 된 것을 기억한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기가 먼저 좋은 쪽을 택 한 다음에 롯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 권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이 문제로 롯을 서운하게 한다거나 둘 사이에 조금이라고 불편한 관계가 갈등이 생기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고 롯과 자신 사이에 화평한 관계가 유지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물질적 유익보다 화평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손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실상은 우리가 서로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하든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입니다. 국민들도 국가야 어떻든지 무조건 더 찾아 먹으면 장땡인 줄 압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시설은 서로 자기 지역에 끌어들이려고 난리를 치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결사반대를 외치고 사생결단하듯이 덤벼듭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나라 사회갈등지수가 OECD국가 중 2위, 이로 인한 손실이 거의 우리나라 예산의 2/3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 비용을 건설적으로 활용하면 우리나라의 GDP가 20%정도 상승할 것이라고는 조사보고서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 행복합니까?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행복합니까? 설령 그렇게 해서 목표를 쟁취하면 행복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갈등과 미움과 불신과 원망과 불평만 남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 자신은 행복하다해도 남이 받은 상처와 고통은 생각지 않습니까?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행복하면 그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당장의 눈앞에 유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선은 믿음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실은 더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행복이 돈에 있는 줄 알고 눈 앞의 유익만 찾으니까 서로의 관계에 금이 가고 갈등과 원망과 미움과 불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가 깨지고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재판을 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가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눅12:15절에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언제나 하나님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세상 영광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당장은 내게 좀 손해가 된다해도 사랑과 은혜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지를 되새겨 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유익이나 생각보다는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고 귀히 여기고 기쁨을 줄 수 있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하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이웃에게도 기쁨을 주며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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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기도예문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귀한
성호를 높이 찬양합니다.
사랑의 주 성령님,
이 험한 세상에서 지난 한 주일 동안도 저희들을 눈동자
처럼 지켜 보호하시고,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주님 앞에 인도해 주심을 감사 찬송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지금 한반도는 북한의 어리석은 위정자들로 하여금 많이
피로해 하며 연일 긴장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합심
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상달되어 저 북한 땅의 어리
석은 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한 주일 동안도 주님을 멀리하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온 죄를 회개하오니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의 보혈로 우
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주시고 말씀을 잘 받아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오늘 이 귀한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주님 앞에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무디어진 우리 심령이
다시 한번 잠을 깨고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특히나 혼란
을 야기시키는 북한 땅의 아둔한 위정자들이 올바른 선
택으로 한반도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옵소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거친 세파에 시달려 메마르고 강퍅해진 우리 심령 위에
십자가의 단비를 흡족히 내려 주옵소서. 기름진 만나로
풍성하게 공급해 주옵소서. 은혜와 주님 희생의 생수로
시원함을 얻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강건한 믿음
으로 세상과 정욕과 사탄을 능히 이기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천국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기를 원
합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하나님의 사자이신 목사님을 통하여 복된 생명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말씀을 아멘
으로 받고, 믿음의 부요와 영적 풍성함을 누리며, 주 하
나님 우리 아버지께 큰 영광 돌리길 원하옵고, 우리의 승
리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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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주일오전예배 대표기도문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삶의 자리에서 눈동자처럼 보호하여 주시고  

거룩한 주일,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시니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 더위가 남아 있지만,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귀뚜라미 소리로 인하여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면서, ​가을을 준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를 주시고,

하루 하루 삶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풍성한 성령의 열매들을 거둘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였지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죄에 빠져 세상에서 방황하며,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졌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매 순간마다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시고,

죄에 대한 영적인 민감함을 잃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 앞에 머리 숙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어려운 시험과 환란에 처한 교우들을 살피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올려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시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도록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발사로 비롯된,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와

국제정세의 불확실한 상황들을 하루 속히 정리하여 주시고,

​전쟁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지켜 주옵소서.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담대함과 용기를 그리고 지혜와 판단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가,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사오니,

우리의 주인 되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온전히 지켜 주시옵소서.

이 땅에 다시는 6.25 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된 것은 

그 곳에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소돔성과 같이 의로운 사람10명이 없어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깨워주시고

잘못을 회개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

이번 일을 계기로 남과 북이 서로 신뢰하며 평화적 통일을 모색할 수 있도록

양측의 지도자들에게 냉철한 지혜와 명철을 주시고

평화의 마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는 서윤석 목사님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고, 

선포하시는 말씀에 권세를 더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는,  

영혼이 새로워지고 새 힘을 얻는 복된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찬양대’가 준비한 찬양을 기뻐 받아주시고

찬양대원들에게는 찬양이 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교역자님들과 장로님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맡겨진 사명과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강건함과 지혜와 명철’을 주옵소서.

각 기관과 지체들이 제 몫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 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교회학교에서 가르침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교사들과

여러 모양으로 헌신하는 봉사자들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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