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예배 설교] 빚진 자


제목 : 빚 진자의 삶

말씀 : 롬1:11~14

1.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마음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오늘 1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로마교회에 여러 번 가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길이 열리지 않아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편지를 써서 로마교회에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로마교회는 바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회입니다. 그는 아직 로마에 가본적도 없어 그가 세운교회는 물론 아니었고, 기타 그가 파송한 다른 사람이 세운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게 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교회였지만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로마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로마교회에 가기를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러분, 바울이 사실 인간적으로는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교회인 로마교회를 그토록 간절히 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다른 아니라 우리는 교회를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 하고 그런 만큼 교회를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몸입니다. 여러분, 엡1:23절을 보십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충만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족해서 교회가 주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곳도 있지만 정상적인 교회라면 주님의 말씀과 은혜와 사랑과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이 귀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주님의 몸인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는 곳입니까? 물론 세상에서 유일하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주고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보다 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감사한 공동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열심히 간절히 찾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으로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교회를 찾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의 몸된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짐으로 주님의 역사를 힘 있게 이루어 가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로마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그토록 로마 교회에 가기를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일단은 물론 주님의 교회가 거기 세워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가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든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더욱더 견고하게 세워져 주님의 역사를 더욱 힘있게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토록 로마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1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여러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그 방문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그게 뭐냐?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주려고 하느냐, 성도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목적은 교회를 견고케 하는 것이고,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는 주는 것은 로마 교회를 견고케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나 교회는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가 물론 외형적으로 발전하고, 건물도 멋있게 지어지고, 프로그램이 좋고, 재미도 있고 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외형적으로 멋있고 재미있고 그럴듯해도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지 못하면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외형이 그럴듯해도 믿음 위에 굳게 서지 못하면 툭하면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고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의 죄되고 왜곡되고 추한 가치관에 휩쓸려 다니고 환난과 핍박이 오면 금방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또 조금만 힘들고 일이 안 풀려도 걱정과 염려와 원망과 불평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세상에 빛을 비추기는커녕 자신도 초라하고 볼품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위에 굳게 서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왜곡된 것들과 유혹과 핍박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게 됩니다. 마귀사탄이 감히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장난을 쳐도 그까짓 마귀사탄의 역사쯤이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까지 세상의 죄되고 왜곡되고 추한 세상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의 권능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다른 방법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써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신령한 은혜가 뭡니까? 앞에서 본 말씀에서는 은혜를 은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은혜와 은사는 거의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은사 그러면 무슨 예언을 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기타 무슨 큰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은사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게 은사를 주겠다는 것은 무슨 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함을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걸 받아야 합니다. 즉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서신서마다 늘 말씀하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은혜가 뭡니까? 그건 뭐 어려운 거 아닙니다. 일단은 구원이 은혜입니다. 이건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로 거저 주신 선물 중에 가장 크고 위대하고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선물로 그야말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완전히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은혜중의 은혜요, 특권 중의 특권이요, 영광 중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다른 은혜는 못받아도 이 은혜만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열 일 제쳐 놓고 구원부터 받아 놓고 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돈벌고 출세하고 영광을 누리고 그런 것들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솔직히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못 받으면 큰 일 납니다. 내일로 미뤄서도 안됩니다. 단 한순간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받은 다음에 받을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은사인 것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다른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열심히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로 풍성해 지는 것보다 더 신령한 은혜로 풍성해 짐으로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과 가치와 풍조나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과 상황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주님의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간절히 가기를 원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너무나 큰 복음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여러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헬라인은 문명인을 말합니다. 야만인은 물론 말 그대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도 같은 의미입니다. 즉 바울은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권세 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든지 누구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득불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빚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과 생명 자체가 빚 아닙니까? 이걸 뭐 내가 무슨 대가를 치루고 받았습니까? 이 몸도 생명도 지혜도 능력도 다 공짜로 받았으니 빚 아닙니까? 이 빚만해도 수조원 아니 수십조도 넘을 겁니다. 수십조원 주면 우리 몸을 만들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귀한 몸을 거저 받은 것만해도 어마어마한 빚인데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빚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물론 복음의 빚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셔서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수십조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빚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원한 시간을 처절한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는데 반대로 영원토록 오직 영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빚입니까?

또 여러분, 그러한 본질적인 빚 말고도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거의 계속 빚으로 가는 겁니다. 땅도 공짜, 태양도 공짜, 비도 공짜, 산소도 공짜, 바다도 공짜, 강도 공짜, 나무도 풀도 꽃도 다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이 빚만 해도 하루에 수억씩 될 겁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늘 빚을 지며 살고 있지요. 부모님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뭐 따지자면 말 그대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빚을 진 사람들로서 우리는 어찌 하든지 조금이라도 빚을 갚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죽도록 충성해도 억만분의 일도 못 갚겠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최선은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어찌하든지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여기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복음 전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여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최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며 갚아야 할 빚은 복음의 빚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의 빚,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아무 대가없이 당신의 그 고귀한 생명을 주신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몇 백억원을 공짜로 받아도 큰 빚일진대 하물며 온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공짜로 주신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으며, 이 빚보다 더 큰 빚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이 보다 더 중차대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해도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심지어 고전9:16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하지요. 빚을 안 갚으면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으로서 그 빚을 갚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화가 있을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씀은 아니지요. 그만큼 복음전도는 우리에게 맡겨진 가장 큰 사명이요 의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빚으로 살고 있지만 특별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새생명을 주시고, 또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얻음으로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데 사순절은 주님께서 얼마나 큰 고난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우리도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기를 힘쓰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집중전도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묵상하고 기도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고 제한하는 일도 있습니다.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전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뭡니까? 영혼을 살리는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 영혼이라도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일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요, 그래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일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귀하고 시급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진 사람들인가를 기억하며 뭔가 조금이라도 주님의 빚을 갚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이나마 복음의 빚을 갚는 일이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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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위하여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위하여

본문 : 요21:1-6

여러분, 영어를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입니다. 직접 부딪쳐서 되든 안되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을 가든 영국을 가든 아니면 미국인 친구를 사귀든 한국에 있는 미국인 가정에 가서 함께 생활을 하든 어쨌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는 것입니다. 접촉하면서 큰소리로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그냥 막 부딪치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는 저절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들이 어떻게 언어를 배웁니까? 그냥 같이 살다보니까 배우는 거예요. 늘 듣고 그냥 따라서 하다보니까 알게 되는 거예요. 실수하면서 잘못 표현하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처음에는 서투르지만 그래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결국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를 배울 때도 하여간 부딪쳐서 하다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날 책상 머리에 앉아서 무슨 부정사, 조동사, 동명사, 관계사, 시제, 가정법이니 하면서 씨름을 해봐야 백날 가도 외국인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법이 훤해도, 아무리 토익 시험에 만점을 맞아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해봐야 합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되어도, 서툴러도, 실수를 해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치가 똑 같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종자는 어떤 것이 좋고, 언제 밭을 갈고, 파종은 언제하고, 어떤 병에는 어떤 약을 쳐야하고, 거름은 어떻게 주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훤히 안다고 해도 직접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지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은 부딪쳐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딪치기 전에 사전 준비도 필요하겠지요. 연구도 필요하겠지요. 정보도 수집해야 되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거예요. 안 부딪치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괴테는 [참다운 지식은 경험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론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경험을 통하여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그 이론이나 지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올바르게 현실화 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과 행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올바른 이론없는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설령 잘못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무지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열심히 수고한 것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행동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논리라고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동화 되어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무언가 가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과 아울러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론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좋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어디에 생명이 있는 어디에 참된 진리가 있는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왜 믿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선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좌우지간 먼저 알아야 그것을 하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그렇습니까? 모르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모르면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은혜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심지어 독약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옆에는 독약병을 놓아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6: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선은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적으로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초등학문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 더 이상으로 주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진정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알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안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바르고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삶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우선은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알고 난 다음에 그 아는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짜장면 맛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진정한 짜장면 맛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먹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어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삶속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는 일에 힘쓰는 것과 더불어 그 아는 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키는 일에도 더욱 힘을 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의미도 사실 이러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이란 일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가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알아보는 기간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분명하게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새겨서 새롭게 분명하게 알고 느낀 사실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려야 할 은혜들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며 그 사명을 감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가다듬은 마음을 우리의 삶속에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진정 많은 열매를 맺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물고기를 잡을 때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을 때 제자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패한 삶에서 성공한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제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렸으니 난 다시 가서 고기나 잡으련다하고 떠나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렇게도 여러 번 이르고 또 일렀건만 그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 죄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 너희에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갔다고 다시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 맡겨준 일들을 감당하거라. 그러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도 일렀건만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 않아서 옛날로 돌아가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동고동락을 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삶을 보았고,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왜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을 보게하고, 앉은뱅이 걷게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도 여러번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에 대하여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그저 정치적 육체적 세상적인 메시야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시자 이제는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로 돌아가서 열심히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고기잡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좀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무엇인가 좀 얻어보려고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이 맞도록 즉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 손에는 피라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요, 배는 빈 배요, 그물은 여전히 빈 그물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좀 얻어서 좀 행복해보려고, 무언가 좀 만족한 삶을 살려고 열심히 수고하고 힘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아무리 평생 동안 발버둥을 쳐도 주님 없는 인생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결산 할때에 그들의 손은 빈손이요, 머리는 빈 머리요, 그들의 삶은 공허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젊음이 남겠습니까? 아름다움이 남겠습니까? 재산이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권력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 뿐이요, 남은 것이라곤 영원한 형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주님을 온전히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라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께서는 주님앞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여, 주님을 보게하소서. 생명의 길을 나도 알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하여음 생명의 생명의 길로 가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에는 바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를 하고 한 마리도 못잡고 실망과 좌절과 공허감에 빠져 있을때에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하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이 그물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향만 조금 바꾼 것이었습니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위치를 약간 수정한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배 하나 사이에서 왼편과 오른편은 큰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왼편이나 오른편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그런데 왼편에 던졌을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오른편에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때는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주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알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좇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하여 손을 펴고, 발을 뻗고,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도, 진리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깨닫고 고백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부활한 존재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삶속에 기쁨이 없고, 우리의 삶속에 진정한 생명의 환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 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이처럼 불의가 넘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이처럼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와 주님 사이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앎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거나 아니면 주님의 뜻이 있음에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더욱 올바르게 온전하게 알기 위하여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만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행동화시키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속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속으로 나아가서 적용시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던지라는 곳에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 진정 주님만이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직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주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며, 그 말씀들을 우리의 일상생활속에 행동화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충만하게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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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4월 부활절설교 부활은 승리이다.


제목 : 부활의 능력

말씀 : 고전15:12~15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고상하고 수준높고 지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없으면 헛일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게 있어야 진짜고 이게 있어야 생명이 있는 종교이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이란 고린도교인 중에 일부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물론 다 부활을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안 하십니까? 여러분,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대로, 예수님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걸 믿으셔야 합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게 없으면 제아무리 고상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빈 쭉정이입니다. 생명이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와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사망과 마귀사탄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려 버리고 승리하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사망권세보다 큰 권세가 없습니다. 사망은 모는 것을 삼켜버립니다. 사람은 물로 돈도 권세도 과학도 삼켜버립니다. 지식도 능력도 아름다움도 젊음도 사랑도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제아무리 잘나도 똑똑하고 지식과 권세가 있어도 사망권세 앞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세를 가졌다해도 사망권세가 한번 내리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힘이 대단합니다. 미국의 무인우주선이 시속 약2만km로 약4개월 동안 비행하여 화성에 착륙하여 사진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니 참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심지어 마음만 먹는다면 복제인간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인간이 참 대단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능력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입니다. 아무리 수억 수조 Km를 날아가는 우주를 탐사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는 속수무책입니다. 제 아무리 인간이 기술이 좋고 과학이 발달해도 쌀 한 톨 만들어 낼 수 없고, 하찮은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명체를 가지고 어떻게 조금 변형시키고 장난을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도 없고,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죽었고, 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도 죽음 앞에서는 쪽도 못썼습니다. 그밖에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나 그 어떤 유명한 과학자나 정치가나 사상가나 영웅호걸이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는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 억눌려 있으실 수 없었던 주님은 사망 권세,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사망의 권세,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전에도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소녀야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소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며 잔잔하라고 말씀하시자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모든 사건들은 그 분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어둠의 권세, 악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 모두가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승리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인류 최대의 적인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 우리에게 어떤 승리인들 못 가져다주겠습니까?

여러분, 눅11:21,22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앞의 강한 자는 사탄입니다. 뒤의 더 강한 자는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인류의 범죄이후에 마치 사탄이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 육신과 물질과 시간과 능력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며 제멋대로 사용하도록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능력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사탄이 제멋대로 사용하던 것들을 빼앗아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우리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삶으로 원위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시험과 유혹이 오든지 고난이나 핍박이나 가난이나 어려움이나 그 밖에 그 어떤 어둠의 권세가 대들든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8:35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그런 것들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지킴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장 강한 자를 이기신 예수님, 그래서 완전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신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물리치신 예수님,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물질이 부족해도, 혹시 육신이 좀 건강치 못해도 혹시 자녀가 뭔가 좀 문제에 직면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원망 불평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그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 모든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평 불만 원망 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분명히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 안에 분명히 생명의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소망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 아닙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망과 위로과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능력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866년 글래스고우 대학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적인 활동을 한 데이빗 리빙스턴 목사님께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학위를 받기 위하여 강단으로 나오는 리빙스턴 선교사는 갖은 고초로 겉모양은 수척 할대로 수척해져 있었고, 사자에게 물린 왼팔은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선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감사와 기쁨으로 힘 있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지낸 세월을 희생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그저 조금이나마 갚으려 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미력하나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저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걸 어찌 희생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맹수와 질병과 혹독한 기후와 야만인 가운데서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갈 것입니다. 거기가 내 삶의 자리이고 거기에 내 인생의 보람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헌신하다가 60세의 나이에 아프리카의 한 오지의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쁨과 보람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백한 대로 부활의 주님을 믿었고 그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로 그리고 주님앞에 설 날에 대한 소망으로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에게는 분명 이런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16:2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염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볼 것이다. 즉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기쁨을 찾을 것이요, 그 기쁨은 그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제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승리를 주셨습니다. 죄로부터 건져주시고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환경 모든 여건 속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과 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위로 가우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런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어둠과 모든 약한 것들과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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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활주일 설교] 부활은 우리의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집필자 서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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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성령을 따르라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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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예배설교 <구원의 문>

 

제목 : 구원의 문

말씀 : 마7:13,14

1.구원의 문과 멸망의 문

여러분,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몇가지 서로 반대 되는 개념들을 대비시켜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6절에서는 거룩한 것과 개, 진주와 돼지를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고, 11절에서는 악한 자와 하나님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오늘 본문 13,14절에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17절에서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대비시키고, 21절에서는 말로만 주여주여 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또 24절 이후에서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신 이유는 뭡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선과 악을 대비시킴으로서 선과 악의 결과를 극명하게 알려줌으로써 어떠한 경우라도 선을 선택하여 생명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좋은 것만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으면 선과 악이 선명하게 들어나서 선이 얼마나 좋은지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만 모여 있으면 되게 착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있으면 착한 것과 악한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 이건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지만 키가 큰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키가 크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키가 큰 사람은 훨씬 더 커 보이고, 작은 사람은 훨씬 더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키크고 덩치큰 우리 정호섭형제 옆에는 최대한 안 가려고 합니다. 가면 제가 더 작아 보이고, 왜소해 보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과 악의 심각한 결과를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기 위하여 종종 선과 악을 대비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오늘 말씀은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러분, 보십시오. 세상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는데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 실감이 나시나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얼마나 극과 극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니 얼마나 복되고 소망이 뒤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문입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문입니까?

만약 실감이 잘 안나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이 아름다운 동산에 꽃이 만발하고 새들이 노래하고 잔잔한 시냇가가 있고 온갖 과일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지금 여러분이 지금 독사가 우굴 거리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고, 유황불이 타오르고, 흉악한 강도떼들이 득실거리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때리고 찌르고 죽이려고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엄청난 공포가 엄습하겠습니까? 이러면 좀 실감이 나시나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생명과 멸망은 그 정도는 이유도 아닙니다. 생명의 길은 더럽고 추하고 무섭고 아프고 죽고 하는 것들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과 영광과 은혜와 평안만이 가득한 천국입니다. 반대로 멸망의 길은 생명의 기쁨과 영광과 은혜와 평안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오직 어둠과 불안과 더러움과 아픔과 저주만이 세세토록 계속되는 지옥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말 그대로 극과 극의 길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무슨 일 있어도 절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하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멸망의 길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원한 고통의 나라가 반드시 있고 다른 중간지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열심히 착하게 살다 죽으면 다 좋은데 갈 거라고 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간의 무지의 소치요, 착각일 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길은 영생과 영벌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 속에 엉뚱한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결코 거기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어떻게 말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기서도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다가 마침내 영생복락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구원의 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왜 좁습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전 세계,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딱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즉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예수님 단 한분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데 그것도 내 마음 내 생각대로 믿으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을 예수님뿐만 아니라 공자나 맹자나 석가나 그 밖에 다른 성인군자나 위대한 영웅이나 혹은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선행을 통해서 갈 수 있다면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까 넓은 문이 되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만 믿어 내 마음대로 믿는다면 그래도 넓은 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요1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행4: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보십시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로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속된 표현을 좀 쓰자면 빼도 박도 못하게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여기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생복락 자체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저렇게 착하게 사는데 설마 예수님 안 믿는다고 지옥에야 가겠어? 저런 종교는 다 건전하고 좋은 것 가르치는 종교인데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 좋은 곳에 가지 않을까?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아무 종교나 좋고 건전한 종교를 믿으면 다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굳이 종교생활 안해도 정말 착하고 의롭게 살면 좋은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생각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특별히 천주교는 이런 종교다원주의를 사실상 거의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월초파일에 절에다가 ‘축석탄’하면서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성당 문 앞에 현수막을 걸어놓기도 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다른 길이 있다고 하면서 무슨 예수님을 믿는 겁니까? 성경이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다른 구원자도 있다고 하면서 무슨 기독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상들은 깨트려 버리라고 하셨는데 우상도 잘 섬기면 예수님 믿는 거나 진배없다고 하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갖 헛소리를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마귀는 온갖 핍박과 조롱으로 우리를 무너트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 길로 감으로 마치 그게 진리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게 대세를 이루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왜곡된 대세를 따라서 비 진리의 길,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거기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누가 어떻게 헛소리를 하고, 대세가 어떻게 흘러가고, 세상의 가치관이 어떻게 왜곡되어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택하고 그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영원힌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죄된 육신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그 길이 협착한 두 번째 이유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죄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세상의 즐거움만 찾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설령 찾으려고 해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죄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오직 세상의 돈과 명예와 즐거움을 찾으며 그냥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뭔가 진리의 길을 찾으려고 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죄와 무지와 아집과 이성과 경험을 고집하기 때문에 진리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최고인줄 알고,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그것만 찾아다니니까 하나님께 대하여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관심이 있기는 있는데 여전히 자기 생각과 고집과 경험과 이성을 버리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니까 생명의 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천국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는 완전히 다른데 세상 원리로 천국을 찾고자 하니 어떻게 찾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이유는 천국이 협소하다거나 천국으로 가는 길 자체가 본래 좁다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이유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천국가기보바 쉬운 길이 없습니다. 천국은 원하기만 한다면 아무나 다 들어갈 수 있는 넓고도 확실한 길입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데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대학 나오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자격증 없어도 됩니다. 무슨 토플이나 토익이나 텝스나 이런 시험 안쳐도 됩니다. 키가 작고 못나도 괜찮습니다. 장애가 있든지 병이 있든지 관계없습니다. 돈 빽 권세 지식 명예 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문이요, 제일 넓은 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길이 좁은 이유는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들이 죽자 사자 죄로 어두워진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즐거움과 육신의 기쁨만을 바라보고 그것만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고 그것을 얻고 가꾸는 일에 인생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빠진 육신의 생각과 이성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려고 하니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지도 않고, 거추장스러워 보이고 귀찮게 여겨지고 간섭하는 것 같고 통제하는 것 같으니까 좁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안가니까 더욱더 좁은 문, 좁은 길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애석하게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너무나 좋고 영광스러운 천국이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저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 즐거움을 준다고 하면 좋다고 난리를 칩니다. 육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준다고 하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경제를 살리고 병을 고쳐주고 재미있게 해주면 인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주겠다고 하면 시큰둥하고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언제가 가장 인기가 좋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줄 때 였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배부르게 해 주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하며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생과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시자 그렇게 구름떼처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6:66절을 보십시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 때부터가 언제입니까? 그 앞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요6:55)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그랬더니 달라는 떡은 안주고 무슨 쓸데없는 말이냐며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냥 도망가 버린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서자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부자되고 형통하고 병 낫고 재미있는 이야기하면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이야기하면 싫어하고, 천국에 대해서 말해도 시큰둥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평안히 잘 먹고 잘 살면 대단하게 여기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상급받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어떻게 생명을 살려서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은총은 물로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너무나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 그냥 내 육신의 소욕대로 마음가는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편하게 여겨집니다. 반대로 주님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간섭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면 싫어합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그냥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마음가는대로 하십시오. 편하게 사십시오. 그러면 좋아하고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삶은 어떤 삶입니까? 마음대로 본능대로 살아가면 그건 결국 동물적인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뭐 그래도 동물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육신의 소욕의 지배를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내가 보기에 편한 길, 가기 쉬운 길,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길,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롬8:13절에서는 그래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순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오늘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고 저와 여러분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인기가 없어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쉬운 길, 편한 길, 내 마음대로 가는 길, 육신의 만족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생명의 길도, 진정한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길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생명의 길로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 생명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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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 설교] 가장 큰 부활의 기쁜소식

제목 : 가장 큰 부활의 기쁜소식

성경 : 행5:27~32

1.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세상의 그 어떤 명절이나 절기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기쁘고 복된 절기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도 다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몸을 입으시고 살아 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두둥실 떠올라 승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세상의 정말 별것 아닌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여기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고상한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믿거나 아니면 그저 세상사는 동안에 복이나 좀 받아보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8:3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요11: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28:6절에서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는데 예수님과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든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능력도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는 그 죽음의 권세와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어두운 세력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히 영화로우신 몸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며 어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놀랍고 위대하고 엄청난 소식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7,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보십시오. 지금 유대의 집권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끌어다가 놓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그가 죽은 책임을 우리 책임으로 떠 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또 그러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제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무슨 헛소리냐?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오직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말할 뿐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셔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고 당당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부활의 능력과 의미와 자신들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감격과 기쁨과 소망과 확신 속에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물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물론 부활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 속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더욱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이니 이성이니 문화니 지식이니 하는 별것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나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 가운데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가장 큰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까요?

2.육체적 안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토록 확실한 사실이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놀랍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에게 가장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능력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그 엄청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저 육체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죽어감으로 오직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육적 물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게 들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노아 가족이외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 가족 외에는 다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느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육체가 된 게 뭡니까? 전에는 육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만족과 기쁨과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만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다보니까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며 웃고 조롱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슨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제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24: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허황된 말처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이 언제 변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자신을 보았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강력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집권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육체의 사람이었는데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활과 천국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생복락을 온전히 믿고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육의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온갖 죄와 무지와 추함과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 속에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오직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의 생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부활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영광의 나라고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인줄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받으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동행함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분은 더욱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청난 사실에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활 신앙은 생명력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하고 완전하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에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에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던 삶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또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데,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데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11: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보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되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그냥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고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 그대로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지금도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그 순간 거듭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론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때에 완벽하고 영원한 승리자로서 세세토록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금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마음껏 맛보며,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함으로 세상에 부활의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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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기도] 사순절주일낮예배 대표기도문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부족한 저희들을 너는 내 것이라 부르셔서

주님의 한없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시니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활의 큰 기쁨과 영광을 저희들에게 주시기위해서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통에 동참하고 참회하는

고백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갱신하고 잘라내야 할 부분을

잘라내게 하시고 끊어 버려야 할 부분을 끊어 버리고 깎이고 다듬어져서

주님의 모습으로 성화되는 결단의 절기가 되게 하여 주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신 주님!

저희의 허물을 주의 보혈로 덮으시고 용서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해방시키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좌절하고 포기한 삶에 삶의 소망과 기쁨과

감사한 참된 삶의 의미를 주시는 생명이심을 확신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로 세우신 우리교회가 십자가의 사랑과

참 생명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요즘 환경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지만

저희는 어떤 일이든 말씀 충만함과 믿음의 기도로 감사와

찬양으로 잘 극복하게 하옵소서.

 

성도들이 올 한 해 하늘 문을 열어가는 가정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고

병마로, 경제문제로 자녀문제로, 직장문제로 어려움 있는 가정마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간구하여 응답받는 사순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고통 받는 이웃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부요케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긴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의 각 기관마다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활기찬 기관이 되게 하여 주시고 모든 기관마다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선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고 늘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저희들 삶이 되게 하여 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기를 거부하지 않고 피 땀 흘려 기도하시며

순종 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저희들도 주님 앞에 순종하는 심령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선우교회를 기억하셔서 병마로 고통 중에 있는 성도에게 주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치유의 손길과 회복의 능력을 체험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저희에게는 기쁨과 사랑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충만케 하옵소서.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아버지!

이 나라와 민족의 고난을 돌아보시기를 기도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늪에 잠겨있는 이 시대에 세상의 방법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 나라 이 민족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과 평안으로 새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교회 목사님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생명력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성도들의 심령에 옥토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렵고 힘든 생활 가운데서도 주님 말씀으로 잘 감당하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섬기며 살게 하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각 부서에서 수고하며 섬기는

성도들을 기억 하시고, 맡은바 직책과 직분을 겸손함과 기쁨으로

감당할 때마다 성령님의 크신 위로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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