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오전 예배설교] 은혜받는 신앙인의 삶

 

 

 

말씀 : 막5:25-34

제목 : 은혜받는 믿음

 

1.주님과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화나 토론을 하다보면 정말 서로 안 통할 때가 있죠? 어떤 때는 정말 작은 문젠데 서로 죽어도 자기 생각이 맞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아 갈등이 생기고 큰소리가 나오고 그래서 서로 간에 틈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치관이나 중요성이나 우선순위의 차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못난 자아 때문입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이 상대방의 뜻이나 방법을 인정해 주면 자기가 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양보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서로 끝까지 자기 주장을 하다가 상처를 주고 공동체의 힘을 빼기도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거 뭐 좀 방법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더라도 그냥 서로 받아 주고 타협하면 될텐데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그거 때문에 서로 굽히지 않고 그래서 교회일을 추진하는데도 협조하지도 않고 너 잘하면 네가 다해라 그러면서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여 대화가 잘 통하게 해야 합니다. 끝까지 자기 잣대를 고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비판만 하지 말고 겸손히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세워지고 모두가 함께 평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렇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더더욱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여 나와 주님 사이에 막힘이 없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이성과 고집을 따라 행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막혀 주님 나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면 누구 손햅니까?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뿐이지요.

 

성경에도 보면 그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보세요. 예수님이 베드로야, 내가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럽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이 땅위에서 메시야 왕국은 누가 건설합니까? 그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지요.

 

또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그래야 너희가 참 자유인이 될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본래 자유인인데 뭘 또 자유인이 된다고 하십니까? 그렇게 대답하지요.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종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국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순진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우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야 살고,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내가 살아서 움직이고, 또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와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잘 안되고 갈등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주님안에서 그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11: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죽은 지 나흘이 지났든 백일이 지났든 백년이 지났든 무슨 상관입니까? 주님이 그냥 그러라면 그러는 것이지요. 내 말을 들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상황이든 환경이든 경험이든 지식이든 이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말씀대로 하라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정말 상황, 환경, 조건 이런 거 따지지 말고 아집, 고집, 편견 이런 것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정말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 구원의 주님, 그 주님과 온전한 교제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상황이나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또한 자신의 고집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먼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순진한 믿음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이성적, 경험적 생각이나 고집이나 아집이나 이런 것 다 버리고 주님 앞에 순진하게 나아가 결국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덧입게 됩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했던 여인입니다. 이 혈루증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병이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요, 불치병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25,26절의 말씀을 보세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여인은 혈루증에 걸려 12년간 고생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하면 종합병원도 찾아가 보고, 한방병원도 찾아가보고, 민간요법도 써보고, 식이요법도 해보고, 벌침도 맞아보고 해 볼 것은 다 해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기는커녕 힘만 들고 재산만 다 탕진하고 도리어 병은 점점 중해 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이 여인의 고통은 단지 이런 육체적,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의 더 큰 고통은 주변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혈루증을 앓게 되면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됐고,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이혼사유가 되는 병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모든 게 절망이었습니다. 육체도 망가지고, 재산도 다 탕진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희망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지방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27,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절망 속에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 즉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중풍병자, 눈먼 자, 귀먹은 자, 앉은뱅이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며 그 말씀이 권세 있는 자의 말씀과 같다던 그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시는 그 예수님이 오신다고! 그렇다면 그분을 만나봐야지. 그분에게 가면 이 문제가 틀림없이 해결 될거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이까짓 병고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진리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마음이 치료받고, 육신이 치료받고, 영혼이 치료받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틀림없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됩니다. 틀림없이 해결됩니다. 육체의 문제, 마음의 문제, 물질의 문제, 영혼의 문제 다 해결됩니다. 다만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믿고 그 분께 의뢰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민11: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허튼 소리를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여러분, 말씀대로 해 보십시오. 왜 안 되겠습니까? 말씀대로 하면 다 해결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든 부자가 안되어도 행복하게 살든, 육신의 병이 다 낫든 병이 안 나아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든 다 해결됩니다. 가정의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시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되게 하시고, 해결되지 않아도 사랑과 은혜로 다 덮게 하시든 여하튼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 바랍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주님안에서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과 육신과 정신이 치료함을 받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길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믿었으면 믿음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믿으면 믿은대로 행동해야 그 믿음이 진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믿는다고 하면서 안 따라가면 그게 뭐가 믿는 거겠습니까?

오늘 27~29절까지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여인이 예수님의 옷데 손만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실제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곧 병이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과정을 잘 보세요. 이 여인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결사적으로 주님의 옷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였으면 이제는 액션을 취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전력을 다해 주님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는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을 보세요. 지금은 예수님께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31절 보세요.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즉 무언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아시고,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을때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아니 주님, 이 많은 무리가 이렇게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말이지요. 즉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 여인뿐 아니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서로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기 위하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예수님께 다가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사적으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빠져나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가만히 계셨는데도 이 여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나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을 만지기만 하면 낫는다. 그러므로 가다가 밟혀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분을 만나야 하겠다. 그분을 만져야 하겠다. 이런 각오와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전심전력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을 만진 사람이 어찌 이 여인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말씀을 들으려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그래서 서로 예수님께 가까이가기 위하여 에워싸고 밀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여인의 만짐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는 만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스쳤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인만이 주님의 옷자락 끝을 겨우 잡았을 때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왜 이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여인의 터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터치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터치했지만 그들의 터치는 무의미한 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터치는 완전한 신뢰와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확신의 터치였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믿는 터치였습니다.

좀전에 보았던 말씀, 28절 보세요.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어떻게 만졌다고요?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만졌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손이 아니라도 좋다. 이분의 발이 아니라도 좋다. 이 분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 이 분이라면, 이 분과 연결된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좋다. 그분과 연결된 지푸라기 하나라도 만져도 그분과 연결되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만졌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이런 터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정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진정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아니 주님께 연결된 지푸라기라도 잡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사적으로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곁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피상적으로 주님 곁을 맴도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녕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믿으며 그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을 때에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속에 역사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러자 결국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29절 말씀을 보세요.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 여인이 그런 믿음으로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그 순간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해 보아야 할 말씀은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부르심의 음성을 보십시오. ‘딸아...’ 그렇게 부르십니다. 여러분, 자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것과 ‘아들아...’ ‘딸아....’ 그렇게 부르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부모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이름을 부를 때도 사랑으로 부르겠지만 웬지 ‘아들아, 딸아’ 그렇게 부르면 더 정감이 있고, 더 진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바로 이 여인에게 그렇게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제는 평안할 것이다. 이제는 행복할 것이다. 이제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 여인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제는 더 이상 영적 무지의 자리에 앉아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 온전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인이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사생결단하고 주님 곁으로 왔듯이 주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오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주변에서 맴돌았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주님 곁에 맴도는 인생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님을 터치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녕 주님의 능력을 덧입으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과 어려운 것들을 이기고 주님의 평안과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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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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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복된 선택

말씀 : 창13:5~13

1.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커다란 황금 돼지가 “꿀꿀꿀꿀”하면서 자기 집으로 들어오더랍니다. 너무 귀한 꿈같아 점쟁이를 찾아가 이야기를 하니까 점쟁이가 당신 집에 노다지가 굴러 들어오는 꿈이니까 로또 복권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부정 타니까 로또 복권 10장을 사서 부적을 하나 구입하여 그 부적으로 복권을 싸되 부적도 싼 것은 별로 효력이 없으니 비싼 것으로 사서 복권을 싼 다음에 절대로 다른 곳에 보관하지 말고 몸 속 깊이 잘 간직하고 가능하면 아무하고도 만나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 말을 못하여 답답하거나 가족이 말을 시키면 그저 ‘꿀꿀꿀꿀’하고 대답을 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로또복권 10장과 거금 50만원을 들여 부적을 사서 복권을 부적으로 싼 다음 품속에 깊이 감추고 부정탈까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아내가 이상해서 왜 그러느냐고 아무리 말해도 대답하지 않더니 자꾸 물으니까 “꿀꿀꿀꿀” 그랬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깜짝 놀라서 아이쿠 돼지귀신이 붙었구나 하면서 무당을 불러 왔습니다. 무당은 남편을 보자 할아버지 귀신, 증조할아버지 귀신, 고조할아버지 귀신 등 세 조상 귀신이 붙어서 보통 굿 가지고는 안 되고 최소한 천만 원짜리 정도의 굿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은 속이 답답해서 또 ‘꿀꿀꿀꿀’ 그랬고 그러자 아내는 야, 이거 정말 센 귀신이 붙었구나 하고는 천만 원을 들여 굿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라 또 ‘꿀꿀꿀꿀’하자 무당이 이건 너무 센 귀신이 붙어서 천만원짜리 굿 갖고도 안 되겠다고 하면서 이천만원짜리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을 더욱 속이 터져 ‘꿀꿀꿀꿀’ 소리쳤고, 그러자 아내는 더욱 걱정이 되어 결국 이천만원짜리 굿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천만원짜리 굿을 하는 날이 바로 로또 복권 당첨 숫자를 발표하는 날이어서 남편은 굿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스마트폰으로 로또 복권 당첨번호를 확인을 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열장 모두 꽝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남편이 입을 열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여편네야, 네가 굿판을 벌이니까 될 일도 안 되잖아!”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무당이 “봐라. 굿을 해서 드디어 조상귀신이 물러가서 말 문이 열렸지!”하고 소리치더니 잽싸게 짐을 챙겨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웃기는 이야기지만 정말 얼마나 미련하고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입니까? 돼지꿈을 꿨다고 복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고 무당이 복권과 부적을 사란다고 사는 사람이나 또 굿을 하란다고 굿을 하는 사람이나 이걸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먹는 무당이나 모두가 죄와 무지속에 있는 미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생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돼지꿈이 복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고, 돼지코에 돈 끼워놓고 고사를 지낸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니고, 부적을 집에 붙여 놓고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니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한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 행위들은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이 마귀사탄에 종노릇하는 미련하고 불쌍하고 이리석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복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인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을 주고, 자신도 영육간 복을 정말 진정한 복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믿음 안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육 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눈앞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택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복된 삶을 살려면 눈 앞에 보이는 당장의 유익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편을 택하고 그 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맡아 기르던 조차 롯이 장성하여 기업을 이룬 다음에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며 어디로 가든 네가 좋은 곳을 택하여 떠나라고 하자 롯이 요단 들을 선택하여 떠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땅에 머물게 된 직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롯은 단순히 육체적인 안목으로 사람의 눈에 보기에 좋은 곳을 택하여 가서 거기에 삶의 터전을 잡았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결국 하나님 편을 택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점점 소돔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뭔가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 롯이 처음부터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롯이 택한 곳은 요단 들입니다. 거기는 목축하기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네가 먼저 택하라고 하니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사람보기에 좋은 요단들을 택했습니다. 즉 그는 그 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나 아브람의 은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판단의 근거는 육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어디까지 갔다는 것입니까? 소돔까지. 소돔이 어떤 땅입니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땅입니다. 온갖 음란과 향락과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땅입니다. 오죽하면 소도미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소도미는 남색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하나님의 뜻이나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는 없이 그저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그저 자기의 유익을 따라 갔다을 때 결국 죄악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완전히 쫄딱 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에 그들이 가지고 갔던 모든 재산들도 몽땅 불태워 없어지고 겨우 몸만 빠져 나왔는데 그나마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어 죽고 롯과 두 딸 사이에는 근친상간이 이루어져 가장 치욕적인 민족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 보기에는 좋은 땅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렀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말씀대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번성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때 뿐 만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편을 택했던 사람입니다. 창12장에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 편을 택하고 떠납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고 결단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곳을 떠나는 것은 부모형제나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그곳에서 닦아 놓은 모든 생활기반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저 이방 땅에 가서 생명의 안전에 대한 보장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다 버리고 가라고 하시면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것도 보여주지도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덮어놓고 가라고 하면 도대체 뭘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 편을 택하고 묵묵히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조건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무조건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라면 그냥 고이 달라고 하시지 왜 하필이면 잡아서 각을 떠서 불에 태워서 달라고 하십니까? 그것도 후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달랑 줘놓고 죽여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니 무슨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경우고 이유고 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성이니 경험이니 논리니 이런 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그러라면 그런 줄 알고 말씀 편을 택하고 시키는대로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롯은 반대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이나 이런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길러준 큰아버지의 은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갔습니다. 그래서 롯은 쫄딱 망했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영적 물질적 축복을 놀랍게 받아 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말씀 편을 택해야 합니다. 주일에 아무리 바빠도 일터를 선택하지 말고 교회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녀와 하나님 중에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십일조냐 자녀 교육비냐가 고민될 때도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월급 많은 곳이냐 주일성수 잘 할 수 있는 곳이냐할때도 마땅히 주일성수 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쁘고 멋있고 능력있는 배우자냐, 그렇지는 못해도 신앙생활 신실하게 하는 배우자냐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신앙생활 신실하게 할 수 있는 배우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밖에 모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론 최상의 선택이요, 최고의 가치요,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부호 록펠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과 주일성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거부가 되기 전에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하여 금광을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금광은 금을 캐낼 만큼 거의 다 캐낸 얼마 안 있어 폐광을 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속아서 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투자금을 몽땅 날리고 광부들은 밀린 임금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십일조 한번 떼어 먹지 않고 꼬박꼬박 드리고 주일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만나게 하십니까?

이렇게 통곡하며 기도를 하는데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록펠러야, 때가 되면 거둘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더 깊이 파거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동안 땅을 파내려 갔을 때 갑자기 누런 황금 대신 시커먼 물이 분수처럼 솟구쳤습니다. 그건 물이 아니라 원유였습니다. 조사결과 거기에는 엄청난 원유가 매장되어 있었고, 결국 록펠러는 이 일로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편을 택할 때에 분명히 최상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을 택하고 진리를 택하는 지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이 택해야 할 최상의 선택이며 최고의 선택임을 믿고 말씀 편을 택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 속에 최상의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보다 화평을 선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물질적 유익보다 사람을 배려하며 평화를 선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9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말씀 앞 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둘 다 가축 떼가 많음으로 서로 가축을 먹이기에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우리는 서로 친족이다. 다투면 안 된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좋은 곳을 택하여 가라. 그러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겠다. 네 영역을 침범하기 않겠다 롯에게 양보하고 조카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한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아브라함이 어른이고, 롯을 길러주어 이렇게 어엿한 한 가문을 이루게 된 것을 기억한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기가 먼저 좋은 쪽을 택 한 다음에 롯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 권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이 문제로 롯을 서운하게 한다거나 둘 사이에 조금이라고 불편한 관계가 갈등이 생기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고 롯과 자신 사이에 화평한 관계가 유지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물질적 유익보다 화평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손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실상은 우리가 서로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하든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입니다. 국민들도 국가야 어떻든지 무조건 더 찾아 먹으면 장땡인 줄 압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시설은 서로 자기 지역에 끌어들이려고 난리를 치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결사반대를 외치고 사생결단하듯이 덤벼듭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나라 사회갈등지수가 OECD국가 중 2위, 이로 인한 손실이 거의 우리나라 예산의 2/3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 비용을 건설적으로 활용하면 우리나라의 GDP가 20%정도 상승할 것이라고는 조사보고서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 행복합니까?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행복합니까? 설령 그렇게 해서 목표를 쟁취하면 행복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갈등과 미움과 불신과 원망과 불평만 남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 자신은 행복하다해도 남이 받은 상처와 고통은 생각지 않습니까?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행복하면 그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당장의 눈앞에 유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선은 믿음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실은 더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행복이 돈에 있는 줄 알고 눈 앞의 유익만 찾으니까 서로의 관계에 금이 가고 갈등과 원망과 미움과 불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가 깨지고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재판을 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가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눅12:15절에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언제나 하나님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세상 영광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당장은 내게 좀 손해가 된다해도 사랑과 은혜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지를 되새겨 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유익이나 생각보다는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고 귀히 여기고 기쁨을 줄 수 있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하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이웃에게도 기쁨을 주며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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