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포기와 행복

 

 


말씀 : 마5:1-12

제목 : 행복과 포기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부딪치는 문제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있으나 막상 교회에 가려고 해도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희생해야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일종의 취미생활이나 계모임 혹은 인격수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투자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에 비하여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져 잘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은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갖는 생각인지 모른다. 처음에야 어차피 영적인 생명의 진리,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 있음으로 단순히 인격수양이나 혹은 질병의 고침이나 혹은 마음의 위안 등등의 목적으로 나오기가 십중팔구인데 그것을 위한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솔직히 나도 그랬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전에는 취미생활로 서예와 바둑을 주로 했었다. 이 취미생활은 둘 다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는 먹 갈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수직 긋기와 수평 긋기, 사선 긋기 등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그냥 쭉쭉 긋는 것이 아니다. 붓 끝에 힘이 들어가야 힘 있는 글씨가 되기 때문에 붓 끝에 힘을 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먹을 갈고, 줄긋기 연습하고 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다. 남의 글씨를 계속 반복해서 쓰는 것이다. 한 글자를 제법 비슷하게 흉내를 내려면 천 번을 써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만번을 쓰면 그 글씨에 통달하여 자신의 글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엄청난 시간과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서예이다.

바둑도 그렇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듯이 바둑을 두다보면 지면 열이 받아서 또 두어야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또 두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너 시간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밥 먹으러 빨리 안온다고 잔소리도 제법 들었다. 또 낚시도 제법 다녔고, 볼링도 좀 쳤다.

그래서 이러한 취미생활을 즐기다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기가 어렵다. 때로는 교회가 너무 사람을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평안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도리어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헌금 생활도 그렇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다. 회사생활하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기타 다른 헌금 계산해 보면 그것을 계속해서 적금을 붓는다면 노후대책이 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들어 올바른 헌금생활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사실은 처음 믿음 생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갈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교회에 다니려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일까?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더 좋고, 더 유익하고, 더 기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인간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평안하고 더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확실하고, 유일한 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생활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구속당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세상 살다보면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즐기고 싶은 일도 많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다. 이것 저것 눈치보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런데 사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러한 생활가운데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술, 담배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좀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술 담배를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술 담배를 못하면 사람이 째째해지고 좁쌀 영감처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화투놀이도 그렇다. 일반인들 사이에 화투놀이로 재미거리를 삼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 다닐때도 끄떡하면 회식이다, 무슨 경조사다 하여 회사 동료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고, 모였다하면 의례히 술?담배와 함께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또 어느 곳에 모여 앉아서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처음에 남자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 재미로 살았는데 그런 것 다 포기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낙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낙을 포기하면 도대체 인생의 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취미생활이 아니더라도 아까 말했다시피 바둑이나 서예나 낚시나 등산, 가족 나들이 등등의 건전한 취미 생활도 그렇다. 사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신앙생활하지 않을 때는 주일날을 잡아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가족간에 나들이도 가고 마음놓고 앉아서 바둑도 두고 글씨도 쓰고 하는데 주일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면 도대체 내 생활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좀더 나은 것을 위한, 좀더 가치있는 것을 위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가장 현명한 투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리는 분명 무언가 나은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간음이나 이런 적극적인 악을 행하는 사람도 무언가 나름대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무언가 자신에게 유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잠깐이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유익한 것들도 그렇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언가 희생과 투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농사도 그렇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봄부터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해주고, 거름과 물을 주고, 병충해를 방제해주면서 뙤약볕 아래서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못먹고 열심히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박사도 그렇다. 정말 제대로 된 박사노릇하려면 정말 힘들다. 심지어는 가정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벌 사장도 그렇다. 물론 호의호식하며 대접받으며 사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직장의 중역만되어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수많은 투자와 인내와 자기포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더 많은 투자와 더 많은 자기포기와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신앙생활은 어떨까? 물론 동일하다. 신앙생활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어서 보다 행복하게 보다 기쁘게 보다 소망가운데 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익하고 좋은 것을 위해서 무언가를 투자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앙생활의 유익은 세상에서 얻는 다른 어떤 유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돈과도 명예와도 권력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유익을 준다. 기쁨을 준다. 은혜를 준다. 생명의 풍성함을 준다.

그러므로 사실상 잃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 더 좋은 것을 위하여 보다 덜 좋은 것은 당연히 포기함이 현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치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12:24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져 썩으면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희생당하여 없어지는 것 같지만 더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원문의 의미는 ?재산을 상실하고 불행속에서 방황하는 거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 것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데 왜냐? 이런 사람은 세상의 것 대신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대신에 더 나은 천국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정말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4절도 그렇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죄와 부족함과 미련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 진정한 위로가 그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안식과 위로와 소망이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10절에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된 사람인데 왜냐, 바로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역설의 진리다. 진정 세상 것 욕심 부리지 않고 오직 진리 때문에, 생명의 역사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는 자 그 사람이 부유하고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천국을 소유하게 되니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14:27에서 또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수없이 자기부인과 포기와 희생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말씀들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어렵게 무엇인가에 얽매어서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평안을 주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또 요8:32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누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너무 잃는 것이 많지 않느냐고 묻거든 그것은 더 나은, 더 보람있는, 더 가치있는, 더 자유로운, 더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사실을 말해주자.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바르게 알자. 정말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구속이 아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다.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해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포기해야 할 부분은 포기하고 드려야 할 것은 드리고 헌신해야 할 부분은 헌신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이지 세상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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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적 종교 활동의 역기능

 

 

한국교회의 금전적 부패가 매우 치명적인 이유는 '구조적인 헌금 강요'가 은밀하게 뿌리를 내리고 '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위적이며 암묵적인 헌금 강요가 예배 속에 위장하거나, 조직 속에 숨어서 은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그나마 비교적 정통인데 '사역'은 갈수록 사이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탈북하신 분들이 교회에 와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북한이 싫어서 나왔는데 도리어 교회가 너무 북한 사회 같아서 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대부분 수 년 내에 교회를 떠납니다. 은근히 헌금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강압적인 종교 활동이 사람을 질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요. 세상은 바보가 아닙니다. 교인이 괜히 줄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상식을 버리면 세상은 교회를 버립니다. 세상이 돈의 노예가 되고 돈에 찌든 개신교를 비웃고 있다는 말이지요.

교회는 무슨 세무서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이든 돈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교회란 정상적인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교회이고,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멸시하는 교회일 뿐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에서 가난한 장로들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요즘 장로님들은 전부 물질적 축복을 듬뿍 받아 그런가요. 아니지요. 교회가 돈으로 직분을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되기 힘듭니다. 그러나 예전엔 교회와 장로님들이 가난해도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협소한 예배당이지만 오손도손 모여 예배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물질을 나누고, 그리고 사람을 키웠습니다. 세상의 칭송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난한 교회에서 경건하고 성실한 신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주의 제자된 성도들의 믿음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요. 교회가 헌금을 바르게 걷고 바르게 사용하면 성숙한 성도들은 더욱 기쁘고 신이 나서 열심히 헌금을 할 것입니다. 설사 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형제나 가난한 교인들이 헌금 좀 덜 내면 어떻습니까.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다른 교우들이 더 내면 되지요.

지금부터라도 한국교회가 구태의연한 '종교적 공동체'를 청산하고 보다 '성경적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그 어떤 교회라도 돈이 없어 쇠락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바른 헌금 없으면 바른 교회 아니다

 아울러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단과 사이비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항상 십일조나 헌금을 왜곡하여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대를 이어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의 토종 이단들치고 세습 안하는 이단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또한 그런 이단들 중에 재정 장부를 공개하는 이단을 본 적이 있던가요.

정통 교단의 미자립 교회들은 다수가 문을 닫기도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단이나 사이비 교회들이 문을 닫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여코 양들을 속이고 약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른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그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여 교회당을 관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교육하고, 교역자들 생활비를 지급하고, 그리고 사회 봉사에 참여합니다. 이런 면에서 헌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교인들에게 바른 헌금의 필요성에 대해 성실하게 가르치고 그 사용에 늘 투명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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