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예배]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막15:16-32)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2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의 주제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마다 십자가를 지는 느낌은 다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 억지로 지는 십자가 (막15:16-25).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막15: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대신하여 얼마동안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창과 칼 앞에 자존심을 다 구기고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날은 시몬에게 "개 같은 날의 오후"며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에게 원치 않았던 굴욕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빨리 던져버려야 속이 시원한 불편한 짐이었으며 그가 비방하고 조롱한 형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위협에 시달리다 더 버티면 어쩐지 뒤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나, 내가 피 흘려 산 교회를 위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게나.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주님, 도우소서! 십자가를 하나 더 얹어주실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2. 마취제를 거절한 십자가(막15:22-25).

  “내가 목마르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목마름과 고통이 있습니다. 갈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과 갈증을 면하기 위해 마취제 같은 쓸개 탄 즙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 없이 양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고통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으며,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십자가의 목마름을 성스러운 목마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런 저런 목마름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으나 쓸개 탄 마취제를 거절하심으로 온 몸 그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통한 희롱과 조롱, 외면이 주는 정신적 고통도 감수했고 무서운 저주도 온 몸과 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가파르게 보이는 해골의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이 제공할 고마운 마취제를 고대하며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위로인 마취제가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과 비평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잽싸게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향한 원망의 느낌,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의 느낌을 못 박아 버렸기에 마취제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연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마취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축복하소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로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3. 죽어야 사는 십자가(막15:30-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던 휘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버리심으로 구원의 새롭고 산 길 을 열어 놓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죽어서야 십자가에서 내려 왔습니다. 저주를 받은 뒤에야 내려 왔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한 뒤에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몸은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했던 테일러 스미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사임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사역을 그만 둘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애써 기도하며 개척했던 사역지를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은 사명을 중단하려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이상 헌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죽기살기로 헌신하더니 10년도 못 채우고 사역지를 떠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령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육신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가?"(고후 4:10)  "아닙니다. 성령님, 내 자존심 때문에 더 이상 목회 못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네. 네 자존심이 죽고, 네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살지 않겠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다면?  ‘사람들의 칭찬, 명예, 자존심, 대우’에 대해서 전보다는 더 적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좋게 말하느냐 아니냐가 우리들의 헌신의 질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열심히 추구하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에선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오늘도 나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준하지 않으신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십자가에서 자아를 단호히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 오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하나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실망해도 분노가 치밀고, 조금만 나의 지도력이 손상 당해도 견딜 수 없어하는 나를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십시오! 내 눈물은 주님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서러워서, 속상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뿐이니, 주여 이 상한 마음마저도 십자가를 못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당돌한 십자가(막 15:42-47;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taking courage)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2-47)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그 당시에 아무런 사회적 권리나 힘이 없는 여성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요, 실패자의 자리에 나서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며 밝히며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가겠다고 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주변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없고, 믿는 사람들이 다 넘어진 것 같을 때 실망하지 않고 나서서 당돌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십자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있는 태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요셉을 당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한 행동은 홀로 죄악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역자의 시신은 가족들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스스로 반역자의 제자라고 공개하는 일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의 제자임을 밝힌 신앙이 바로 빌라도와 세상이 볼 때 당돌한 신앙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반역자로 몰아가도 좋다. 아니 예수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 빌라도 당신도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라는 담대함이 이 시신을 달라는 요구에 담겨있었습니다.

 
  요셉이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자신의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이 비난당할 때 드러내 놓고 변호하지 못했던 니고데모, 드디어 그도 요셉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당당히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예수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근이나 되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은 왕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 사용하는 만큼의 많은 분량입니다. 내가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도록 도와주소서!  

 
  5. 자랑의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고 사신 분 중에 최초의 미국 침레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7년 동안 열심히 사역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보게 저드슨 형제, 너무 낙심치 말게나.”

그러자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심이라고? 예수 안에서 소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네!”  

  25년의 세월이 흘러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선교하면 영국이 대표였습니다. 미국이 아직 선교에 미약할 때였는데 위대한 사역을 마친 저드슨이 돌아오자 전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의 보고하는 자리에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의 입에서 나올 흥미진진한 선교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저드슨 선교사는 첫째 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저드슨이 번역한 미얀마-영어 사전과 미얀마 번역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7년 동안 열매가 없다가 그 후 20여 년 동안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원주민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침례를 베푼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가서 죽을 뻔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일화도 자세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둘째 날도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사람들은 셋째 날엔 틀림없이 선교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죄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기다리다 못해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님, 성도들은 오늘 다른 설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선교사님이 겪으신 재미있고 극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또 선교사님이 회중교회 선교사의 신분으로 출발했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왜 침례교회 선교사로 바뀌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길 들려주십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습니까? 자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꽉 채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시다.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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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설교] 예수님 부활의 증거

 

말씀 : 고전15:1-8

제목 : 부활의 증거들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만해도 그렇습니다. 이성적, 논리적, 과학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법칙에 의하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질서도 절대로 저절로 생겨 날 수 없습니다.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면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나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과학적으로는 절대로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저절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저절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대답은 하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니 모든 이성이나 지혜나 과학이나 질서나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과학과 지성과 이성과 경험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이성과 경험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행2: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결단코 사망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의 부활은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도 이성과 경험안에 갇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1)성경과 예수님이 증거입니다.

부활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4절을 보겠습니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은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3:5절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6:10절에서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즉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고하였고,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뭐가 되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허무맹랑하고 휘황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정신 이상자가 기록한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대의 거짓말장이요, 과대망상자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만큼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성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는 죽을 거다. 살아날 거다 말씀하셨는데 성인으로 믿는다면 따라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과대망상주의자, 정신이상자로 몰아가야 정상 아닙니까? 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성경이 어떻게 20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수십억권이 팔린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하여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따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있는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쓰레기 같은 것으로 여기든지........

지난 주일에 전도를 하다보니까 윗마을 버스 정류장 밑에 집 할아버지가 자기네 가문에서 사회로 진출했으면 판검사는 넉넉히 하고도 남을 제일 똑똑한 두 놈들이 하필이면 목사가 되었다고 한탄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다시 오신다. 예수님 믿어야 죄용서받고 천국간다. 당신네들은 그걸 미친소리라고 하는데 그 똑똑한 두 놈이 바보 멍청이 천치라서 그걸 믿고 그걸 전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분명히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진정 유일한 부활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빈무덤이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무덤이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냈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감춰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릴 것을 우려하여 무덤입구를 큰 돌로 막은 다음에 바위와 무덤 양쪽 벽에 밧줄로 여러 번 동여매고 진흙을 발라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세워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밧줄 아니라 쇠사슬로 백번천번만번을 묶어놔도 소용없고, 진흙 아니라 쇳물을 부어놔도 소용없습니다. 경비병 아니라 경비병 할아버지를 세워놔도 소용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는 무덤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임으로 무덤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8: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천하없는 사람이라해도 다 무덤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권세 앞에 그 어떤 조그마한 저항도 한번 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져 무덤에서 끝났습니다. 공자는 곡부성의 사수언덕에 안장되어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은 62세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무덤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무덤이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덤의 권세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서는 생명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무덤에 갇힌 자가, 사망 권세에 진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셨기 때문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에 집착하지 마세요.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연속극에 보면 무덤 앞에 가서 막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부질없는 짓입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생기가 있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썩어 냄새나는 시체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만 생명과 희망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천하없는 것이라해도 다 무덤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생명과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시고 살아가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만해도 16번이나 됩니다.

오늘 본문 5-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심어는 500여명이 모여 있는 곳에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다가 500여명의 문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고, 귀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산증인이 되어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제자들의 삶이 증거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하나같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일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생명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고 증거하다가 하나같이 다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바보가 거짓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요새 말로 총 맞았습니까? 안 그래요? 혹시 돈이나 한보따리 안겨 주든지 무슨 큰 권세나 하나 준다면 몰라도 돈이나 명예는커녕 환난과 핍박과 죽음만이 돌아올 그 일을 위해서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 잠깐 있는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더 소중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알량한 이성과 지식과 경험속에 갇혀 거짓말이다, 환상이다, 신화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연 정말 부활할 수 있을까하면 의심하거나 잘 믿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걸어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가 있지? 어떻게 물이 갈라져 벽처럼 설 수가 있지? 여러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의 한계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주님의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절망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모든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다 이기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의 촉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내 작은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틀을 깨트려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 부족한 것들, 어려운 것들, 죄된 것들 다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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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 참 열매를 맺으라 

 


•찬송 90장 (통 98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성경 요한복음 15:1~15:11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용

사람 가운데는 일중심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계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일중심적인 사람이기보다 관계중심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일이나 원칙보다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늘 죄인들 가운데에 계셨고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주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열심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심이 특심일 때, 자칫하면 일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도 하고, 공들여 한 일까지 그르치게도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나무에 잘 붙어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무에 잘 붙어있으면 뿌리를 통해서 물과 양분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과 양분을 잘 공급받게 되면 열매는 저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 안에 거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도 우리 안에 함께 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될 때 많은 과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비유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까닭도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 하신 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15: 16).
단, 열매맺기를 원한다면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유지돼야 합니다. 만일 주님과 관계없이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참 열매가 아니라 나의 열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할 것은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늘 주님을 온전히 붙들어 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5절)”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먼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기도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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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절 대표기도

 


우리를 영원히 변호하시고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날마다 성결한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성령님,


이 시간도 우리의 온전치 못한 마음과 생각과 행실을 정결케 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옵소서.


성결의 영이시여, 이 시간 우리의 예배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사 침체된


우리의 영혼을 일으키소서, 연약한 육신에 힘을 불어넣으시며,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오소서.


진리의 영이시여,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 머물게 하옵소서. 몸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원하시는 성령님,


우리의 거친 마음을 기경하사 옥토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 밭에 말씀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성령이시여,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도록 날마다 우리의 삶을 간섭해 주옵소서.


우리의 생각을 성령의 통치 안에 있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인도하심에 맡겨


사탄이 좋아하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성령께서 파수하심으로 은혜롭고 덕스럽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시는 성령님,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을 감찰하옵소서.


우리 안에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지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려는


또 하나의 힘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이 탄식합니다. 오, 우리를 날마다 다듬어 가시는 성령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강력한 죄의 성향을 통제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머물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 주님, 우리가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거하게 하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안에 살게 하셔서 날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게 하옵소서.


행동의 변화보다 마음의 변화가 있게 해주시고, 외적인 행동 이전에 내면의 철저한 변화가 있게 하옵소서.


성령님, 우리로 하여금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열매로 증명하는 신실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어떤 세파나 거짓된 교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매사에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우리 안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는데,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임을 드러내개 하옵소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성령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연약한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기도할 바를 모를 때우리를 도우시며,


연약한 육체 위에 치유의 은총을 허락해 주옵소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주님을 좀 더 잘 섬길 수 있게 해주옵소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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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헌신예배]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말씀 : 막11:1-6

제목 : 주가 쓰시겠다하라

1.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래봬도 왕년에는 공부 꽤나 했습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도 저를 알았습니다. 왜요? 이상합니까? 여러분, 지금은 세월이 변해서 안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선생님은 그야말로 하늘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교장 선생님이 나를 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어느 추운 겨울날 점심 먹고 눈쌓인 운동장에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조학환, 이리 와 보거라. 너 사택에 가서 사모님한데 내 책상 위에 있는 노란 서류봉투를 달라고 해서 가져오너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귀찮은 일 아닙니까? 친구들하고 신나게 눈싸움 하고 놀고 있는데 심부름을 시키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귀찮다고 투덜거렸겠습니까? 신이 나서 달려갔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물론 신이 나서 달려갔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날 불러 주시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여러분, 그때 교장 선생님 사택에 한번 들어가 보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었습니까? 그래서 그 하늘 같은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부르셔서 심부를 시켜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신이 나서 달려가서 사모님한테 서류 봉투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렇게 심부름을 하고 제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야, 나 이런 사람이야, 교장선생님이 아는 사람이야, 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어깨가 으쓱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뭔가 심부름을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입니까? 얼마나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입니까?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얼마나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입니까?

여러분, 인생 최대의 저주가 뭐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에이, 쓸모없는 인간’ 그런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우리에게 정말 쓸모있고 가치있고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인생이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여기, 하나님의 집에 앉아 계신 것을 정말 영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영광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시켰습니까? 무슨 직분이나 직책이나 사명을 주셨습니까? 영광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와 기쁨과 감격 속에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것도 뭔가 쓸모가 있어서 뭔가 시키셨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딤전1:12절을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무엇을 감사했습니까? 무엇을 영광으로 여겼습니까? 직분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무언가를 나에게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서 그는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나같은 것을 부르셨다는 것, 나같은 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 나같은 것도 뭔가 쓸모가 있어서 사명을 맡겨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진정 영광으로 여기며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감당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의 것이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거의 마쳐가실 즈음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중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끌고 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만약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대로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려고 하자 주인이 와서 왜 끌고 가느냐고 묻고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군말 없이 나귀를 보내 주었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런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3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니까 즉시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가 쓰시겠다. 즉 주인이 끌고 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끌고 오라고 하셨으니 너는 아무 소리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귀의 주인은 군소리 없이 나귀를 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원하실 때 그냥 아무소리 없이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님은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도 시간도 재능도 건강도 물질도 땅도 바다도 하늘도 산도 강도 공기도 모두가 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요구하실 때 고스란히 내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달라하면 생명을 드려야 하고, 물질을 달라고 하면 물질을 드려야 하고, 재능을 달라고 하면 재능을 드려야 하고, 시간을 달라하면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가대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특별히 찬양할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찬양할 수 있는 입과 찬양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찬양할 수 있는 건강과 찬양할 수 있는 환경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입과 그 고운 목소리와 그 건강과 재능을 주신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용도가 있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에 쓰시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을 성가대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입과 목소리와 재능과 건강을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이자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만왕의 왕되시며, 영광의 왕이신 주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기쁨이고, 은혜이고, 특권인지를 기억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세우신 목적이고, 이것이 인생 최대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주님이 우리의 소유권자이심을 분명히 인정하고 주님이 주신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재능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찬양대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부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건강과 재능을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찬양할 때에 주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또 기억할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모든 인생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낼 것이다.’ 여러분, 보세요.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이유가 없습니다. 생각해보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계산해보고 머리굴릴일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감히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도전할 수 없고 권위있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과 거기에 걸맞는 능력과 권한과 강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씀에 나귀의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니까 나귀의 주인은 군소리 없이 즉시 나귀새끼를 예수님께 내어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든 피조물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신 주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군소리 없이 즉시 감사와 기쁨으로 내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찬양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43:7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43:21절을 보십시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드셨다. 우리를 찬송하기 위하여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느냐 가장 먼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고,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으니까 마땅히 찬양으로 영광돌리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지요.

더구나 여러분, 모든 찬양이 다 귀하지만 예배중의 찬양은 더더욱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요4: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자,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보세요. 성가대는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감당하는 너무나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시는 찬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인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사명입니까?

여러분, 이 귀한 찬양의 직분에 더욱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나같은 것을 불러주시고, 게다가 이 귀한 찬양으로 돌리는 직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열심히 찬양하겠습니다. 주님의 세우심에 감격하여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즉시 순종하겠습니다. 주일날 빼먹지 않고 열심히 나와서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러저런 핑계대지 않고 즉시 순종하겠습니다. 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성가대 여러분, 물론 힘드시겠지만 그러나 정말 최선을 다하여 주일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우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사용된 것이 세상의 어떤 곳에 사용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죽어가는 영혼 살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고, 자신의 생명을 가장 풍요롭고 가치있게 하는 가장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하루만큼이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께 큰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찬양대는 주일예배시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예배를 향기롭게 하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게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하며 주일날 어떤 일이 있어도 그야말로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라면 주님의 존전에 나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게 주어진 물질, 내게 주어진 시간들, 재능들, 내 맘대로 쓰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러면 결국 마귀의 종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쓰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귀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지 못한 것은 결국은 모두 마귀의 것이 됩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사용한 것만이 저 영광의 하늘 곳간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마6:19,20절을 보세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찬양대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너무나 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주일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좀 일찍 와서 열심히 준비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과 믿음을 다하여 열심히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좀 힘들더라도 일찍 와서 열심히 연습하고 좀 일찍 예배당에 들어와서 성가대가 떡하니 앞에 앉아서 준비 찬송을 인도하고 그래서 예배전부터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는 우리 성가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시간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생명이며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품안에서 쉬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생명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는 시간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 힘과 위로와 소망을 얻는 시간입니다.

예배드리고 찬양할 때에 은혜가 임하고 능력이 임하고,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매였던 것이 풀어집니다. 바울과 실라가 죽을 만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찬양할 때에 매였던 것이 풀어지고 감옥문이 열렸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며 찬양할 때에 사울에게 들렸던 악신이 물러갔습니다. 여호사밧이 성가대를 적군 앞에 세우고 찬양할때에 적군들이 자기들끼리고 치고박고 싸우며 전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를 신뢰하여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에게 큰 은혜와 능력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성가대원들은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새기며 여러분을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찬양대원으로 부르셔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향기로운 예배가 되게 하고,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가대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이 우리를 쓰시려고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고,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며,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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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기도예문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귀한
성호를 높이 찬양합니다.
사랑의 주 성령님,
이 험한 세상에서 지난 한 주일 동안도 저희들을 눈동자
처럼 지켜 보호하시고,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주님 앞에 인도해 주심을 감사 찬송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지금 한반도는 북한의 어리석은 위정자들로 하여금 많이
피로해 하며 연일 긴장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합심
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상달되어 저 북한 땅의 어리
석은 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한 주일 동안도 주님을 멀리하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온 죄를 회개하오니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의 보혈로 우
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주시고 말씀을 잘 받아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오늘 이 귀한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주님 앞에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무디어진 우리 심령이
다시 한번 잠을 깨고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특히나 혼란
을 야기시키는 북한 땅의 아둔한 위정자들이 올바른 선
택으로 한반도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옵소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거친 세파에 시달려 메마르고 강퍅해진 우리 심령 위에
십자가의 단비를 흡족히 내려 주옵소서. 기름진 만나로
풍성하게 공급해 주옵소서. 은혜와 주님 희생의 생수로
시원함을 얻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강건한 믿음
으로 세상과 정욕과 사탄을 능히 이기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천국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기를 원
합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하나님의 사자이신 목사님을 통하여 복된 생명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말씀을 아멘
으로 받고, 믿음의 부요와 영적 풍성함을 누리며, 주 하
나님 우리 아버지께 큰 영광 돌리길 원하옵고, 우리의 승
리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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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설교] 부활의 능력

제목 : 부활의 능력

말씀 : 요11:21-27

1.유일한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오늘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어둠, 부정적인 것, 약한 것, 죽음, 마귀사탄,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온갖 멸시 천대 능멸 조롱 뺨맞음을 당하시고 그 모질고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은 결코 힘이 없어서도 아니요, 지혜가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완전한 승리를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약함과 추함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죄와 무지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고통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이 더럽과 악하고 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능력과 권세가 충만하시고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따위 어둠과 무덤과 사탄과 죽음의 권세 아래 계속 머무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는 그 권세와 능력으로 죄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시오 생명의 주권자이시오 그 안에만 온전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내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마다 영원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 이 귀한 날, 복된 날, 승리의 날을 맞이하여 정말 온전히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이 온전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이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이러한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이시며 능력이신 주님을 늘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살아감으로 정말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능력과 은혜와 감사와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이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무기도 문명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생명을 조금 연장하고 조금 더 건강하게 도울 수는 있겠지만 결코 죄의 문제 해결할 수 없고 생명의 살릴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완전한 능력과 지혜자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자신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셨고, 죽음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눅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러 가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청년이 즉시 살아나 관 뚜껑을 벗기고 나왔습니다. 또한 막5장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을 때 예수께서 찾아가셔서 ‘달리다굼’ 즉 ‘소녀야, 일어나거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또 요11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에 장사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서도 또 명령하셨습니다. 요11:43,44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이걸 뭐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적으로 말이 됩니까? 만약 사람이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 그런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고 그래서 그런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죽음에게 명령하셨고, 그러자 죽음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물러가고 생명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하시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오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다시한번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5,26절에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별거 아닙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력, 명예, 돈, 과학, 지식 이런 것들 진짜 별거 아닙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진짜 능력, 진짜 소망, 기쁨, 승리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보내며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여 그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능력과 승리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은 영원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의 승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승리입니다. 세상의 사람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문명이 그 어떤 것이라해도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줄 수도 없고 또 그나마 조금 준다고 해도 얼마 안 있으면 다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자이십니다. 주님의 부활이 바로 그러한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의 상징이요 표본이요 증거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어둠과 무지와 슬픔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신 완전한 승리인 것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보기 좋게 정복하셨고, 그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도 그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승리를 누리며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병이 걸립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을 모셔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님께서는 곧바로 오시지 않고 뒤늦게 오셨는데 그것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였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난 상황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방 죽었다해도 아무 방법이 없을텐데 하물며 죽어서 나흘이 지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실로 엄청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앞에서 보았던 25,26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걱정하지 말아라. 슬퍼하지 말아라. 왜 두려워 하느냐, 왜 절망하고 있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나사로도 살 것이고, 너희들도 살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셨고,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에게 생기가 돌아와 어정어정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어도 산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눈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기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절망도 끝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완전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광의 부활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영으로 주님과 함께 천국의 은총을 누리다가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15:55~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의 새아침에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완전한 영원한 부활이 있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직도 세상은 죄와 무지속에 있고 우리의 부활은 그 부활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세상에 살면서 마음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곧 지나갑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고통도 지나고, 병도 지나가고, 부귀영화도 지나가고 걱정염려 다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부활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은 현재적 승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오늘 나사로의 가정도 보세요. 나사로의 가정은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절망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오늘 21절부터 24절까지 주님과 마르다의 대화 내용을 보십시오. 그 대화에 보면 마르다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이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설령 죽었어도 지금이라도 주님이 무엇이든지 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을 해놓고는 막상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 것이라고 하자 마지막 날에 부활 때에는 그렇게 되겠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마지막 날은 살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벌써 부패가 되어 냄새가 나는데요. 물론 나중에는 부활하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부활하여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는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겠지만 지금은 슬프고 어둡고 않습니까?’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어째서 머언먼 피안의 세계만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말은 머언먼 미래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포함한 모든 날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안에 있는 자는 비록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죽어도 산다는 말씀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조금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불로장생이라도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죽기는 죽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여기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죽음이나 절망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이기고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 낙심 절망 세상 환경 상황 뭐 이런 것들에게 사로잡혀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지 아니하고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은혜와 소망과 감사가 넘쳐나는 그야말로 생명력이 넘치는 진짜 산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현재적 천국도 누리고 영원한 천국도 누리니까 죽어도 산자요 살아도 산자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온전히 모셔들이고 사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살아있는 삶을 삽니다.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능력가운데 삽니다. 죄와 사망과 어둠과 슬픔과 고통과 미움과 시기와 욕망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지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정복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17:21에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한다고해서 실제적으로 임할 천국이 장소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된 천국이 오기 전까지는 천국이 돈 많은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나 지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을 모신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죽으면 천국가고 힘들면 주님 앞에 맡기고 기쁘면 주님께 감사드리고 어려우면 주님 앞에 아뢰고 어차피 죽을 인생이 이제 죄사함은 받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티켓은 확실히 따 놓았겠다 뭐 근심걱정염려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다.

여러분, 요14: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놓았으니 나를 믿고 이 세상 사는 동안도 걱정 근심 염려하지 말고 사명감당하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함으로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어둠과 추함과 약함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무덤에 묻어버리고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오셔서 우리의 마지막 원수 죽음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완전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 은혜의 주님을 모시고 그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모든 죄와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 시간 다시 한번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부정적인 것들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들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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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장 큰 기쁨의부활소식

성경 : 행5:27~32

1.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세상의 그 어떤 명절이나 절기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기쁘고 복된 절기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도 다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몸을 입으시고 살아 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두둥실 떠올라 승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세상의 정말 별것 아닌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여기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고상한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믿거나 아니면 그저 세상사는 동안에 복이나 좀 받아보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8:3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요11: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28:6절에서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는데 예수님과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든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능력도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는 그 죽음의 권세와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어두운 세력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히 영화로우신 몸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며 어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놀랍고 위대하고 엄청난 소식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7,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보십시오. 지금 유대의 집권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끌어다가 놓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그가 죽은 책임을 우리 책임으로 떠 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또 그러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제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무슨 헛소리냐?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오직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말할 뿐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셔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고 당당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부활의 능력과 의미와 자신들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감격과 기쁨과 소망과 확신 속에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물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물론 부활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 속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더욱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이니 이성이니 문화니 지식이니 하는 별것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나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 가운데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가장 큰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까요?

2.육체적 안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토록 확실한 사실이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놀랍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에게 가장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능력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그 엄청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저 육체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죽어감으로 오직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육적 물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게 들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노아 가족이외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 가족 외에는 다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느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육체가 된 게 뭡니까? 전에는 육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만족과 기쁨과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만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다보니까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며 웃고 조롱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슨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제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24: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허황된 말처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이 언제 변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자신을 보았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강력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집권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육체의 사람이었는데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활과 천국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생복락을 온전히 믿고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육의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온갖 죄와 무지와 추함과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 속에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오직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의 생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부활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영광의 나라고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인줄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받으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동행함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분은 더욱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청난 사실에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활 신앙은 생명력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하고 완전하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에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에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던 삶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또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데,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데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11: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보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되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그냥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고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 그대로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지금도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그 순간 거듭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론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때에 완벽하고 영원한 승리자로서 세세토록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금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마음껏 맛보며,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함으로 세상에 부활의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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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 설교] 빚진 자


제목 : 빚 진자의 삶

말씀 : 롬1:11~14

1.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마음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오늘 1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로마교회에 여러 번 가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길이 열리지 않아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편지를 써서 로마교회에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로마교회는 바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회입니다. 그는 아직 로마에 가본적도 없어 그가 세운교회는 물론 아니었고, 기타 그가 파송한 다른 사람이 세운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게 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교회였지만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로마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로마교회에 가기를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러분, 바울이 사실 인간적으로는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교회인 로마교회를 그토록 간절히 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다른 아니라 우리는 교회를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 하고 그런 만큼 교회를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몸입니다. 여러분, 엡1:23절을 보십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충만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족해서 교회가 주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곳도 있지만 정상적인 교회라면 주님의 말씀과 은혜와 사랑과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이 귀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주님의 몸인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는 곳입니까? 물론 세상에서 유일하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주고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보다 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감사한 공동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열심히 간절히 찾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으로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교회를 찾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의 몸된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짐으로 주님의 역사를 힘 있게 이루어 가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로마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그토록 로마 교회에 가기를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일단은 물론 주님의 교회가 거기 세워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가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든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더욱더 견고하게 세워져 주님의 역사를 더욱 힘있게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토록 로마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1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여러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그 방문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그게 뭐냐?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주려고 하느냐, 성도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목적은 교회를 견고케 하는 것이고,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는 주는 것은 로마 교회를 견고케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나 교회는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가 물론 외형적으로 발전하고, 건물도 멋있게 지어지고, 프로그램이 좋고, 재미도 있고 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외형적으로 멋있고 재미있고 그럴듯해도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지 못하면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외형이 그럴듯해도 믿음 위에 굳게 서지 못하면 툭하면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고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의 죄되고 왜곡되고 추한 가치관에 휩쓸려 다니고 환난과 핍박이 오면 금방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또 조금만 힘들고 일이 안 풀려도 걱정과 염려와 원망과 불평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세상에 빛을 비추기는커녕 자신도 초라하고 볼품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위에 굳게 서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왜곡된 것들과 유혹과 핍박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게 됩니다. 마귀사탄이 감히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장난을 쳐도 그까짓 마귀사탄의 역사쯤이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까지 세상의 죄되고 왜곡되고 추한 세상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의 권능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다른 방법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써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신령한 은혜가 뭡니까? 앞에서 본 말씀에서는 은혜를 은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은혜와 은사는 거의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은사 그러면 무슨 예언을 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기타 무슨 큰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은사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게 은사를 주겠다는 것은 무슨 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함을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걸 받아야 합니다. 즉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서신서마다 늘 말씀하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은혜가 뭡니까? 그건 뭐 어려운 거 아닙니다. 일단은 구원이 은혜입니다. 이건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로 거저 주신 선물 중에 가장 크고 위대하고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선물로 그야말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완전히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은혜중의 은혜요, 특권 중의 특권이요, 영광 중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다른 은혜는 못받아도 이 은혜만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열 일 제쳐 놓고 구원부터 받아 놓고 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돈벌고 출세하고 영광을 누리고 그런 것들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솔직히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못 받으면 큰 일 납니다. 내일로 미뤄서도 안됩니다. 단 한순간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받은 다음에 받을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은사인 것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다른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열심히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로 풍성해 지는 것보다 더 신령한 은혜로 풍성해 짐으로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과 가치와 풍조나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과 상황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주님의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간절히 가기를 원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너무나 큰 복음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여러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헬라인은 문명인을 말합니다. 야만인은 물론 말 그대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도 같은 의미입니다. 즉 바울은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권세 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든지 누구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득불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빚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과 생명 자체가 빚 아닙니까? 이걸 뭐 내가 무슨 대가를 치루고 받았습니까? 이 몸도 생명도 지혜도 능력도 다 공짜로 받았으니 빚 아닙니까? 이 빚만해도 수조원 아니 수십조도 넘을 겁니다. 수십조원 주면 우리 몸을 만들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귀한 몸을 거저 받은 것만해도 어마어마한 빚인데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빚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물론 복음의 빚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셔서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수십조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빚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원한 시간을 처절한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는데 반대로 영원토록 오직 영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빚입니까?

또 여러분, 그러한 본질적인 빚 말고도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거의 계속 빚으로 가는 겁니다. 땅도 공짜, 태양도 공짜, 비도 공짜, 산소도 공짜, 바다도 공짜, 강도 공짜, 나무도 풀도 꽃도 다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이 빚만 해도 하루에 수억씩 될 겁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늘 빚을 지며 살고 있지요. 부모님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뭐 따지자면 말 그대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빚을 진 사람들로서 우리는 어찌 하든지 조금이라도 빚을 갚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죽도록 충성해도 억만분의 일도 못 갚겠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최선은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어찌하든지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여기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복음 전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여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최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며 갚아야 할 빚은 복음의 빚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의 빚,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아무 대가없이 당신의 그 고귀한 생명을 주신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몇 백억원을 공짜로 받아도 큰 빚일진대 하물며 온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공짜로 주신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으며, 이 빚보다 더 큰 빚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이 보다 더 중차대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해도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심지어 고전9:16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하지요. 빚을 안 갚으면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으로서 그 빚을 갚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화가 있을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씀은 아니지요. 그만큼 복음전도는 우리에게 맡겨진 가장 큰 사명이요 의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빚으로 살고 있지만 특별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새생명을 주시고, 또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얻음으로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데 사순절은 주님께서 얼마나 큰 고난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우리도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기를 힘쓰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집중전도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묵상하고 기도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고 제한하는 일도 있습니다.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전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뭡니까? 영혼을 살리는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 영혼이라도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일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요, 그래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일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귀하고 시급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진 사람들인가를 기억하며 뭔가 조금이라도 주님의 빚을 갚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이나마 복음의 빚을 갚는 일이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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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위하여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위하여

본문 : 요21:1-6

여러분, 영어를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입니다. 직접 부딪쳐서 되든 안되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을 가든 영국을 가든 아니면 미국인 친구를 사귀든 한국에 있는 미국인 가정에 가서 함께 생활을 하든 어쨌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는 것입니다. 접촉하면서 큰소리로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그냥 막 부딪치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는 저절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들이 어떻게 언어를 배웁니까? 그냥 같이 살다보니까 배우는 거예요. 늘 듣고 그냥 따라서 하다보니까 알게 되는 거예요. 실수하면서 잘못 표현하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처음에는 서투르지만 그래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결국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를 배울 때도 하여간 부딪쳐서 하다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날 책상 머리에 앉아서 무슨 부정사, 조동사, 동명사, 관계사, 시제, 가정법이니 하면서 씨름을 해봐야 백날 가도 외국인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법이 훤해도, 아무리 토익 시험에 만점을 맞아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해봐야 합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되어도, 서툴러도, 실수를 해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치가 똑 같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종자는 어떤 것이 좋고, 언제 밭을 갈고, 파종은 언제하고, 어떤 병에는 어떤 약을 쳐야하고, 거름은 어떻게 주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훤히 안다고 해도 직접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지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은 부딪쳐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딪치기 전에 사전 준비도 필요하겠지요. 연구도 필요하겠지요. 정보도 수집해야 되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거예요. 안 부딪치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괴테는 [참다운 지식은 경험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론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경험을 통하여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그 이론이나 지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올바르게 현실화 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과 행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올바른 이론없는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설령 잘못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무지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열심히 수고한 것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행동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논리라고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동화 되어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무언가 가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과 아울러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론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좋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어디에 생명이 있는 어디에 참된 진리가 있는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왜 믿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선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좌우지간 먼저 알아야 그것을 하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그렇습니까? 모르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모르면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은혜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심지어 독약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옆에는 독약병을 놓아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6: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선은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적으로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초등학문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 더 이상으로 주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진정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알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안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바르고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삶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우선은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알고 난 다음에 그 아는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짜장면 맛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진정한 짜장면 맛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먹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어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삶속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는 일에 힘쓰는 것과 더불어 그 아는 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키는 일에도 더욱 힘을 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의미도 사실 이러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이란 일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가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알아보는 기간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분명하게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새겨서 새롭게 분명하게 알고 느낀 사실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려야 할 은혜들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며 그 사명을 감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가다듬은 마음을 우리의 삶속에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진정 많은 열매를 맺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물고기를 잡을 때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을 때 제자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패한 삶에서 성공한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제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렸으니 난 다시 가서 고기나 잡으련다하고 떠나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렇게도 여러 번 이르고 또 일렀건만 그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 죄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 너희에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갔다고 다시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 맡겨준 일들을 감당하거라. 그러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도 일렀건만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 않아서 옛날로 돌아가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동고동락을 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삶을 보았고,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왜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을 보게하고, 앉은뱅이 걷게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도 여러번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에 대하여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그저 정치적 육체적 세상적인 메시야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시자 이제는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로 돌아가서 열심히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고기잡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좀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무엇인가 좀 얻어보려고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이 맞도록 즉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 손에는 피라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요, 배는 빈 배요, 그물은 여전히 빈 그물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좀 얻어서 좀 행복해보려고, 무언가 좀 만족한 삶을 살려고 열심히 수고하고 힘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아무리 평생 동안 발버둥을 쳐도 주님 없는 인생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결산 할때에 그들의 손은 빈손이요, 머리는 빈 머리요, 그들의 삶은 공허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젊음이 남겠습니까? 아름다움이 남겠습니까? 재산이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권력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 뿐이요, 남은 것이라곤 영원한 형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주님을 온전히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라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께서는 주님앞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여, 주님을 보게하소서. 생명의 길을 나도 알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하여음 생명의 생명의 길로 가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에는 바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를 하고 한 마리도 못잡고 실망과 좌절과 공허감에 빠져 있을때에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하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이 그물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향만 조금 바꾼 것이었습니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위치를 약간 수정한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배 하나 사이에서 왼편과 오른편은 큰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왼편이나 오른편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그런데 왼편에 던졌을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오른편에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때는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주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알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좇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하여 손을 펴고, 발을 뻗고,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도, 진리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깨닫고 고백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부활한 존재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삶속에 기쁨이 없고, 우리의 삶속에 진정한 생명의 환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 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이처럼 불의가 넘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이처럼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와 주님 사이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앎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거나 아니면 주님의 뜻이 있음에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더욱 올바르게 온전하게 알기 위하여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만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행동화시키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속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속으로 나아가서 적용시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던지라는 곳에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 진정 주님만이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직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주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며, 그 말씀들을 우리의 일상생활속에 행동화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충만하게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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