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예배 설교] 가장 큰 부활의 기쁜소식

제목 : 가장 큰 부활의 기쁜소식

성경 : 행5:27~32

1.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세상의 그 어떤 명절이나 절기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기쁘고 복된 절기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도 다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몸을 입으시고 살아 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두둥실 떠올라 승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세상의 정말 별것 아닌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여기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고상한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믿거나 아니면 그저 세상사는 동안에 복이나 좀 받아보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8:3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요11: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28:6절에서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는데 예수님과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든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능력도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는 그 죽음의 권세와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어두운 세력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히 영화로우신 몸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며 어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놀랍고 위대하고 엄청난 소식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7,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보십시오. 지금 유대의 집권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끌어다가 놓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그가 죽은 책임을 우리 책임으로 떠 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또 그러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제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무슨 헛소리냐?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오직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말할 뿐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셔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고 당당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부활의 능력과 의미와 자신들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감격과 기쁨과 소망과 확신 속에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물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물론 부활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 속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더욱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이니 이성이니 문화니 지식이니 하는 별것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나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 가운데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가장 큰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까요?

2.육체적 안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토록 확실한 사실이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놀랍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에게 가장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능력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그 엄청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저 육체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죽어감으로 오직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육적 물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게 들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노아 가족이외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 가족 외에는 다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느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육체가 된 게 뭡니까? 전에는 육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만족과 기쁨과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만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다보니까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며 웃고 조롱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슨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제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24: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허황된 말처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이 언제 변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자신을 보았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강력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집권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육체의 사람이었는데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활과 천국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생복락을 온전히 믿고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육의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온갖 죄와 무지와 추함과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 속에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오직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의 생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부활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영광의 나라고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인줄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받으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동행함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분은 더욱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청난 사실에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활 신앙은 생명력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하고 완전하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에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에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던 삶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또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데,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데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11: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보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되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그냥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고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 그대로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지금도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그 순간 거듭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론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때에 완벽하고 영원한 승리자로서 세세토록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금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마음껏 맛보며,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함으로 세상에 부활의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가정예배] 기근 중에 살아남은 여인


본문 : 열왕기하 8장 1~6절

신앙고백 : 사도신경

말씀 : 사람들은 오늘도 생존의 경쟁 속에서 날마다 긴장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날마다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겨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근 중에서 살아남은 한 여인을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믿음의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나라를 때리고 또 때려도 돌아올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7년 동안 기근의 채찍을 들고 계십니다. 이 기근 속에서 한 여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초청을 받고 살아남습니다. 그가 살아남았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 포기의 영성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근이 무려 7년 동안 있을 것이므로 이곳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또 한번의 도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부유한 여인이었고, 그러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에는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와 기반을 떠나는 것이 더욱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떤 결정을 하고 있습니까. 2절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이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위기의 시간에 자신의 소유와 기반을 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없어질 것과 없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없어질 것은 자신의 많은 소유였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위기와 어둠의 시간이 올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움켜쥐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먼저 점검할 것은 ‘놓아야 할 것’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것과 영원한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이미 열왕기하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죽고 사는 것을 경험했던 여인입니다. 오늘 위기와 기근의 시대에 가장 먼저 우리가 점검할 것은 이것입니다. 두 번째, 포기의 영성이 준비된 여인에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전격적인 도우심이 있습니다. 7년의 기근을 마치고 다시 고토로 돌아왔을 때, 여인의 땅과 집은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간섭하십니다. 여인이 왕에게 요청을 하려고 나아올 때, 때마침 왕은 엘리사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있습니다. 왕은 게하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면서 마음에 거룩한 두려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수넴 여인이 찾아왔고, 게하시는 바로 이 여인이 기적의 은혜를 받은 주인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은 이 여인의 소유를 돌려줄 것을 전격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기근 속에서 영원한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없어질 것을 마음으로 내려놓고 포기한 여인, 결국 이 여인이 기근 속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생존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사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포기의 영성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 속에 능력의 말씀으로 전격적으로 간섭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그들로 하여금 기근 중에도 망하지 않고 살아남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 의인은 기근 중에도 먹을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믿음의 여인과 같이 내려놓고 인도받아 기근 중에도 살아남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박지웅 목사 (서울 내수동교회)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부활절 오전 예배 설교] 부활의 승리


제목 : 완전한 승리의 부활

말씀 : 요11:21-27

1.유일한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오늘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어둠, 부정적인 것, 약한 것, 죽음, 마귀사탄,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온갖 멸시 천대 능멸 조롱 뺨맞음을 당하시고 그 모질고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은 결코 힘이 없어서도 아니요, 지혜가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완전한 승리를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약함과 추함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죄와 무지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고통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이 더럽과 악하고 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능력과 권세가 충만하시고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따위 어둠과 무덤과 사탄과 죽음의 권세 아래 계속 머무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는 그 권세와 능력으로 죄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시오 생명의 주권자이시오 그 안에만 온전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내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마다 영원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 이 귀한 날, 복된 날, 승리의 날을 맞이하여 정말 온전히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이 온전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이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이러한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이시며 능력이신 주님을 늘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살아감으로 정말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능력과 은혜와 감사와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이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무기도 문명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생명을 조금 연장하고 조금 더 건강하게 도울 수는 있겠지만 결코 죄의 문제 해결할 수 없고 생명의 살릴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완전한 능력과 지혜자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자신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셨고, 죽음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눅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러 가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청년이 즉시 살아나 관 뚜껑을 벗기고 나왔습니다. 또한 막5장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을 때 예수께서 찾아가셔서 ‘달리다굼’ 즉 ‘소녀야, 일어나거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또 요11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에 장사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서도 또 명령하셨습니다. 요11:43,44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이걸 뭐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적으로 말이 됩니까? 만약 사람이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 그런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고 그래서 그런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죽음에게 명령하셨고, 그러자 죽음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물러가고 생명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하시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오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다시한번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5,26절에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별거 아닙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력, 명예, 돈, 과학, 지식 이런 것들 진짜 별거 아닙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진짜 능력, 진짜 소망, 기쁨, 승리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보내며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여 그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능력과 승리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은 영원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의 승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승리입니다. 세상의 사람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문명이 그 어떤 것이라해도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줄 수도 없고 또 그나마 조금 준다고 해도 얼마 안 있으면 다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자이십니다. 주님의 부활이 바로 그러한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의 상징이요 표본이요 증거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어둠과 무지와 슬픔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신 완전한 승리인 것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보기 좋게 정복하셨고, 그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도 그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승리를 누리며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병이 걸립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을 모셔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님께서는 곧바로 오시지 않고 뒤늦게 오셨는데 그것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였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난 상황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방 죽었다해도 아무 방법이 없을텐데 하물며 죽어서 나흘이 지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실로 엄청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앞에서 보았던 25,26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걱정하지 말아라. 슬퍼하지 말아라. 왜 두려워 하느냐, 왜 절망하고 있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나사로도 살 것이고, 너희들도 살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셨고,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에게 생기가 돌아와 어정어정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어도 산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눈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기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절망도 끝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완전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광의 부활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영으로 주님과 함께 천국의 은총을 누리다가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15:55~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의 새아침에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완전한 영원한 부활이 있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직도 세상은 죄와 무지속에 있고 우리의 부활은 그 부활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세상에 살면서 마음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곧 지나갑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고통도 지나고, 병도 지나가고, 부귀영화도 지나가고 걱정염려 다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부활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은 현재적 승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오늘 나사로의 가정도 보세요. 나사로의 가정은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절망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오늘 21절부터 24절까지 주님과 마르다의 대화 내용을 보십시오. 그 대화에 보면 마르다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이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설령 죽었어도 지금이라도 주님이 무엇이든지 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을 해놓고는 막상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 것이라고 하자 마지막 날에 부활 때에는 그렇게 되겠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마지막 날은 살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벌써 부패가 되어 냄새가 나는데요. 물론 나중에는 부활하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부활하여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는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겠지만 지금은 슬프고 어둡고 않습니까?’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어째서 머언먼 피안의 세계만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말은 머언먼 미래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포함한 모든 날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안에 있는 자는 비록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죽어도 산다는 말씀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조금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불로장생이라도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죽기는 죽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여기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죽음이나 절망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이기고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 낙심 절망 세상 환경 상황 뭐 이런 것들에게 사로잡혀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지 아니하고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은혜와 소망과 감사가 넘쳐나는 그야말로 생명력이 넘치는 진짜 산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현재적 천국도 누리고 영원한 천국도 누리니까 죽어도 산자요 살아도 산자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온전히 모셔들이고 사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살아있는 삶을 삽니다.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능력가운데 삽니다. 죄와 사망과 어둠과 슬픔과 고통과 미움과 시기와 욕망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지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정복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17:21에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한다고해서 실제적으로 임할 천국이 장소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된 천국이 오기 전까지는 천국이 돈 많은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나 지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을 모신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죽으면 천국가고 힘들면 주님 앞에 맡기고 기쁘면 주님께 감사드리고 어려우면 주님 앞에 아뢰고 어차피 죽을 인생이 이제 죄사함은 받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티켓은 확실히 따 놓았겠다 뭐 근심걱정염려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다.

여러분, 요14: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놓았으니 나를 믿고 이 세상 사는 동안도 걱정 근심 염려하지 말고 사명감당하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함으로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어둠과 추함과 약함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무덤에 묻어버리고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오셔서 우리의 마지막 원수 죽음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완전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 은혜의 주님을 모시고 그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모든 죄와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 시간 다시 한번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부정적인 것들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들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낮예배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설교 예화] 심은대로 거둡니다.  

 

어떤 두 소년이 열심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소년이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는 데는 전혀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한 소년은 성경을 읽으며 찬양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열심히 출석했다. 그러나 다른 한 소년은 동네 친구들과의 사귐을 목적으로, 특히 어떤 한 소녀에 대한 관심으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세월이 흘렀을 때 두 번째 소년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녀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 그만 교회에 흥미를 잃고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을 때 사이좋은 친구였던 이 두 소년은 서로 가슴 아픈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친구와 이성간의 사귐을 위하여 교회에 나오다가 그만 둔 소년이 범죄자가 되어 형무소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던 소년이 훌륭한 성직자가 되어 찾아간 것이다.


둘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친구 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자 옛 친구는 다시 예수님 믿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은 이미 20년전에 결정되었을 것이다. 누구와의 만남을 위해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왔느냐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모습을 결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말씀 > 설교예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 예화 :: 루터의 깨달음  (0) 2018.06.14
[겨자씨] 기독교 신앙의 믿음  (0) 2018.05.15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낮예배설교]참된 인생의 주인

 

제 목 : 인생의 완전한 주인

말 씀 : 눅11:21-26

1.인간은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보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외모나 조건이나 이런 것들에 신경 쓰거나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인생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생각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고 그래서 발전성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주도적인 자세는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분수를 모르고 진짜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완벽한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이는 정말 치명적인 착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완전한 주인이라고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나나마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거지요. 안 그래요? 우리가 다 죄인이요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요 한계가 있는 데 자기가 주인이라며 자기 생각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어떻게 오류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해야 되는데 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또 생명은 어떻습니까? 시간은 어떻습니까? 돈은 어떻습니까?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생명도 시간도 돈도 건강도 자식도 권세도 명예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거두어가시면 속된 말로 찍소리 못하고 반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가 진짜 인생 주인행세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강합니다. 즉 인본주의,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누가 뭐라 건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왜 남의 눈치나 심지어 하나님의 눈치도 안보고 선 진리 의 거룩 이런 것들도 신경 안 쓰고 그저 나 좋은 대로 나 편한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 내 돈, 내 시간 하면서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 기쁨을 주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기쁨과 만족과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이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탄의 술수와 모함과 유혹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처럼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며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치달아 가면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며 정신을 차리고 이런 왜곡된 가치관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주인의식을 가지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거야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과 도전과 속임수에 속지도 않고 능력 있게 물리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습게 여기고 얼씬 거리지도 못하고 또 설령 덤벼든다 해도 즉각 깨닫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하나님 안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달려가면서 정말 능력 있고 생명력 넘치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은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고, 이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에 속한 모든 유혹이나 핍박이나 더럽고 추한 것들을 얼마든지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왜곡된 물결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시험과 도전과 환경과 상황과 어둡고 칙칙하고 추한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탄의 모든 지배 속에서 온갖 왜곡된 가치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심령 속에서 사탄이 좋아하는 것들을 씻어버리고 사탄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들, 반대로 말하며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물러가고, 성령님이 기쁘시게 우리 심령 속에 거하심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똥파리가 어디에 꼬입니까? 똥이 있는 곳입니다. 벌은 어디로 날아갑니까? 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디에 거하기를 좋아합니까? 깨끗하고 아름답고 향내 나는 심령입니다. 마귀는 어디가 좋다고 얼씨구나하고 들어와서 서식합니까? 더럽고 추한 심령입니다. 마귀는 우리 심령 속에 악하고 추하고 속되고 거짓되고 음란한 것들을 자꾸 집어넣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으면 얼씨구나 네가 내 친구로다 하면서 좋다고 그 심령 속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 속에 믿음과 선과 의와 거룩함 등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성령님이 기쁘시게 거하시게 되고 그러면 마귀는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소위 빈집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제압당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회에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추했는지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심령이 깨끗해지자 귀신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못되어 이 사람에게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찾아봤지만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이 사람에게 와 보았더니 깨끗이 수리가 되어 있긴 한데 주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귀신은 이 영혼을 완전히 제압하고 유린하여 거기 거하기 위하여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악한 귀신 일곱의 지배로 돌아가 전보다 더 형편없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빈집의 비유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을 청소했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는 것입니다. 25절 보세요.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 말씀은 귀신이 쫓겨났기 때문에 수리가 되었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청소를 하였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집은 인간의 심령입니다. 심령이 청소되었다는 것은 물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음란한 것들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살만한 곳이 못되니까 나가게 되었고 귀신이 나가니 그 심령이 더욱 깨끗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자꾸 귀신 귀신 그러니까 혹시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데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한번 죽으면 낙원과 음부로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낙원과 음부에서도 서로 왕래할 수 없고 이 세상과도 왕래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집을 수리했을 때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 속의 온갖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들어오셔야 깨끗해지지만 성령이 들어오시게 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추함 가운데 있는지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완전치는 못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히 못한 것들을 심령 속에서 스스로 추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가 서식할 공간을 해체시키고 반대로 우리 심령의 공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과 의와 거룩한 것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도망가고 성령님이 기쁘시게 거함으로 은혜 충만한 삶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약4:7,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도망하고 하나님이 가까이해주심으로 은혜가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꾸만 우리 심령을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의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심령 속에 더럽고 추한 것들이나 원망이나 분노나 증오나 욕심들이나 마귀에 속한 것들이 자리 잡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귀가 쫓겨나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한 다음에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건 뭐냐 주님을 우리의 새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은 약간의 은혜를 받고 심령을 좀 깨끗이 함으로 귀신이 나가긴 했는데 그리고 나서 주님을 온전히 새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갔던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그 영혼을 무참히 짓밟고 유린해서 전보다 더 형편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 정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심령을 깨끗이 청소를 했으면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완전히 새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러운 마귀사탄이 다시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웬만큼 청소를 하긴 했는데 완전한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지 않으면 자칫하면 또 마귀의 밥이 되기 싶다는 것입니다. 마귀란 놈은 얼마나 집요한지 쫓겨나가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찾아와 때로는 유혹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핍박을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덮쳐 우리 영혼을 유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름대로 마음을 청소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영위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말씀도 묵상한다해도 정말로 예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언제든 허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니 사실은 온전히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에 불과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는데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생명과 감격과 기쁨도 맛보지 못하고 다니니까 사단의 표적이 되어 집요하게 유혹하고 사납게 대들면 그만 사단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에게 명령하시고, 마귀에 호통을 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분을 주인으로 섬기면 감히 마귀사탄이 얼씬 거리지 못합니다. 혹시 얼씬거리면서 수작을 건다해도 즉시 깨닫고 사탄아 물러가라 호령하면 쫓겨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22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이고, 더 강한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사탄도 나름대로 힘이 있어서 세상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마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강한 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을 무장해제 시켜버리면 사탄은 꼼짝없이 자신이 지배하던 것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추한 것들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는 정말 온전히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이미 모셔들인 분들은 절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생각, 내 이성, 내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지 말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감히 마귀 나부랭이가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를 보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을 깨끗이 하고 주님을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 모셨으면 이제는 그 말씀을 따라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더욱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한마디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 편에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꾼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한지를 안다면,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안다면 생명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주님이 그 영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안다면, 그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않다면 어떻게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물론 우선은 자신이 먼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것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수수방관하는 일이요,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의 힘을 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고의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헤치지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반대한 것이나 헤친 것과 진배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더욱 활기차게 하고, 생명력이 있게 하고,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전도하고 하면 얼마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겠습니까? 얼마나 영성이 풍성해지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겠습니까? 또한 그러한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힘차게 이루어져 가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수고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씀으로 우리 심령 속에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 들임으로 진정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차게 이루어 가며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조학환목사 / 하강교회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오후예배설교]우리를 택하신 이유

 

제목 : 우리를 택하신 이유

말씀 : 딤전1:12-17

우리는 정말 감사할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어딨나? 내가 무얼 잘나고 선하다고 날 찾아와 만나주셨나? 뭐 남보다 선하다고 날 구원해 주셨나? 내 생명, 시간, 육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천가지 만가지 억가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겠나!

만약 우리가 자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어 별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근심 걱정 염려 불평하며 산다면, 아니면 맨날 더 달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적으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 부모 앞에서 억지로라도 행복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1.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직분 맡겨 주심에 감사함(12,13절)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예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사와 기쁨 속에 죽도록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설령 충성되이 여겨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도 일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세워주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고 영광 돌릴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 같은 것을 주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나 같은 것을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나큰 영광인가?

게다가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추한 존재였나?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나? 얼마나 많은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었나? 그런데 그런 나를 주님의 자녀로 받아 주신 것이다. 주님의 자녀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왕자가 되는 것도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재벌의 자녀가 되는 것도 제법 누릴 것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까짓 것들과 비교나 되겠는가?

또한 우리 각자에게 귀한 달란트와 사명을 주셨다. 직책과 직분을 주셨다. 이게 보통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명암에 근사한 직함을 새겨 가지고 다닌다. 무슨무슨 박사 ○○○, 변호사 ○○○, 의사 ○○○, 국회의원 ○○○, 나는 목사 조학환이다. 나는 이게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로 ○○○ 이것도 엄청난 영광이다. 꼭 목사 장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사 ○○○, 집사 ○○○. 꼭 직분자만 그런 게 아니다. 성도 ○○○, 이것도 얼마나 굉장한 이름인가? 아니 사실은 이게 가장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성도, 대단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자녀. 이 이상 더 귀한 이름이 어디 있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이게 상상이 가나? 세상의 무슨 직함이나 직책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단 말인가? 또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빛으로 생명으로 은혜로 인도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귀하겠나?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아름답겠나? 중요하겠나? 보람 있겠나? 가치가 있겠나?

게다가 나 같이 자격도 없는, 공로도 없는 인생에게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믿음과 이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요, 그저 영광 돌리며 기쁨으로 감당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주의 풍성하신 은혜에 감사함(14절)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주님의 자녀가 되고 게다가 귀한 직분까지 맡겨 주신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셨든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질병이나 환난을 통해서 했어도, 설령 나 혼자 믿게 되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이다.

안 그런가? 뭐 우리가 그렇게 남들에 비해 특별하게 착하게 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더 겸손한 것도 아니고, 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나를 부르셨는지는 모른다. 그건 그냥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요, 그것이 결코 내 의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의와 공로와 겸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저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미련하고 부족하고 직분이나 직책이나 달란트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긍휼을 입은 까닭.(15,16절)

딤전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살인죄나 음란죄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 도덕적 윤리적 죄보다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가표를 던지고 하는 일이 더 큰 죄이다. 물론 윤리적 경제적 정치적 죄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악한 죄이긴 하지만 복음의 역사를 막는 자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 죄수까지도 회개하는 자는 받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죄까지도 참으사 구원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죄인에 대하여 참으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도 참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며 복음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야 될 것에 대한 모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 괴수와 같은 날 참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도 참고, 심지어는 내게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음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요 사명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4.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17절)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직분을 맡겨 주신 것,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 죄인 중의 괴수를 불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보내고 있다.

만세의 왕이란 시간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고안해서 손으로 만든 어떤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를 말한다. 홀로 하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만이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유일하신 참 신이므로 이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다.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오직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지의 주재이시다.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시간적 질적 공간으로 완전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 의하여 모든 역사는 진행된다. 알든 알지 못하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람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 구원해 주셨다.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자.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자.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발하여 주님 품으로 인도하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출처: 조학환 (하강교회)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예배설교] 청년부 헌신예배 청년들에게 새 힘)


주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저희들을 주님의 은혜로 지켜 보호하여 주시고 오늘 이렇게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주님 앞에 찬양 드리며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특별히 자신의 주장과 패기만을 앞세우며 살기 쉬운 청년 시절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으며 주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사랑의 주님!
하지만 젊다는 이유로 지나친 자만심에 사로잡혀 살아온 청년도 있을 줄 압니다. 젊음과 패기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청년들도 있을 줄 압니다. 이시간 젊음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사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하게 하시고, 인생의 주인이 되신 주님께 겸손히 자기를 내어 맡길 수 있는 청년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청년들 중에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지 못하고 기분에 이끌려 교회의 문턱을 밟는 청년들도 있을 줄 압니다. 우리 주님이 그 심령 속에 찾아 가셔서 저들의 영안을 밝혀 주시사 인생의 참된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게 하여 주시옵고 주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일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주님을 위한 열심과 열정이 교만함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앞서가는 지나침이 되지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교회를 통하여 불러주신 주의 청년들이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데 한결같이 귀중한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청년들의 헌신을 통해서 더욱 건강히 교회, 젊은 교회가 되게 하시고 독수리 날개 짓 함 같이 강한 믿음으로 비상하는 힘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헌신의 삶을 살고 져 헌신을 다짐하면서 주님께 드리는 청년들의 헌신 예배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 주시옵고 이 청년들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도구로 삼아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청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단위에 세우신 목사님을 기억 하시고 선포 하시는 말씀마다 권세를 더하여 주셔서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들과 모든 성도들이 심령의 뜨거움을 경험하게 하시고 새 힘을 얻어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 하오며 죄인은 아무 공로 없사오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찬양예배설교 } 새 노래로 찬양하라

 

 

 

 


제목 : 새 노래

말씀 : 계5:9-12

1.찬송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찬송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치 약방에 감초와 같아서 신앙생활에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예배에서도 찬송이 없으면 예배가 안될 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뭐 당연하지요. 여러분, 찬양이 뭡니까? 사람이나 기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아름답고 훌륭하고 멋있고 위대함을 크게 기리고 드러내는 일입니다. 찬송은 그런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교회의 찬송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구원하심에 대하여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그 영광과 구원과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의와 선의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하며 크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구원하심을 알고서야 어떻게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 놀라운 사실을 세상에 널리 전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세상에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가 바로 찬양인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토록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47: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시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찬양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그야말로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선과 의와 구원과 거룩의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가운데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같이 중요한 찬양생활을 할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은 찬송은 인간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사랑과 의와 선과 지혜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 선과 의로 가득하신 하나님, 그래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는 그저 벌레와 같은 존재요 오직 하나님만이 온 우주만물에게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찬송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보너스이지 그것이 진짜 찬송의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왕이면 최대한 목소리도 가다듬고 박자와 음정도 맞추고, 좋은 악기도 동원하여 아름답고 훌륭한 음악성을 가지고 찬송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일류 합창단에서 최고의 찬송을 부르거나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최고의 연주자들이 최고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건 찬양이 아니라 그냥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찬송을 부를 때에 진정한 신앙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기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부르는 건지,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래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젊은이들 멋있게 신나게 찬양할 때보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부르는 건지 아니면 교인들에 보여주고 들려주려고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또 성가대 찬양이나 성도들이 특송을 부른 후에 박수를 치는 문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그 박수가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박수라면 모르겠으나 박수 치는 모습을 보면 그다지 그런 것 같지를 않습니다. 학교나 기타 다른 단체에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나 노래를 부르고 나서 잘했다고 박수를 쳐 주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특송하고 나서 ‘와 잘한다.’면서 박수를 친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박수입니까? 마치 가수나 합창단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서 박수를 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시117:1절을 보십시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또 고전10: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누구를 찬양합니까? 누구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누구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찬양을 비롯한 모든 신앙적 행위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구원하심과 사랑을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찬송, 하소연하는 찬송, 자신의 평안과 만족을 위한 찬송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은혜에 영광을 돌려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런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부르려면 어떻게 찬송해야 합니까?

3.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만난 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조금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어떤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역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믿어야 두 번째는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바르게 분명히 알고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게 온전한 신앙고백이 되고 그래야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그러면 찬양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신앙고백속에 찬양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속성이란 그 분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으로 당연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확실하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야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아도 혹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회 속에 온갖 부조리와 죄가 만연되어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라가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일 뿐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선과 의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답답하고 외롭고 걱정근심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과 의와 사랑과 진실로 건재해 계십니다. 때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왜 하나님께서 방관하고 계시는지, 떻게 선을 이루어가실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지전능하시며 선과 의와 지혜와 사랑의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시63:3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또 시135: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성실과 인자와 거룩하심과 높으심으로 인하여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나 세상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이 어떻게 알고 이해하고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선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이런 것들을 벗어던지고 겸손히 엎드려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모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는 삶을 살려면 우선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 밖의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인도하심이었음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적이로든 물질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 어떤 영역에서든 우리가 이렇게 살아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주관하시며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우리가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도 육신도 물질도 시간도 영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된 것입니다. 숨 한 번 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역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 어떤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여기에 보니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봉은 심판의 판결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를 봉인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떼는 순간 심판이 집행되는데 이 인봉을 떼어 심판을 집행할 권한은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런 권세를 본래부터 가지고 있거니와 게다가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심으로 그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믿지 않으면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12절에서는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주님만이 오직 홀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고백하며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죽임당하신 어린양,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능력과 권세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역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서 무엇을 한들 인류를 살리는 이 사역에 비견되겠습니까? 세상에서 어떤 위대한 일이 이보다 더 위대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히 갖다 댈 수가 있겠습니다. 이걸 알고 믿으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의와 선하심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맥추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모든 상황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고난주간 설교:: 인류 구원을 위해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