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4월 부활절설교 부활은 승리이다.


제목 : 부활의 능력

말씀 : 고전15:12~15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고상하고 수준높고 지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없으면 헛일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게 있어야 진짜고 이게 있어야 생명이 있는 종교이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이란 고린도교인 중에 일부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물론 다 부활을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안 하십니까? 여러분,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대로, 예수님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걸 믿으셔야 합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게 없으면 제아무리 고상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빈 쭉정이입니다. 생명이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와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사망과 마귀사탄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려 버리고 승리하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사망권세보다 큰 권세가 없습니다. 사망은 모는 것을 삼켜버립니다. 사람은 물로 돈도 권세도 과학도 삼켜버립니다. 지식도 능력도 아름다움도 젊음도 사랑도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제아무리 잘나도 똑똑하고 지식과 권세가 있어도 사망권세 앞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세를 가졌다해도 사망권세가 한번 내리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힘이 대단합니다. 미국의 무인우주선이 시속 약2만km로 약4개월 동안 비행하여 화성에 착륙하여 사진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니 참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심지어 마음만 먹는다면 복제인간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인간이 참 대단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능력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입니다. 아무리 수억 수조 Km를 날아가는 우주를 탐사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는 속수무책입니다. 제 아무리 인간이 기술이 좋고 과학이 발달해도 쌀 한 톨 만들어 낼 수 없고, 하찮은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명체를 가지고 어떻게 조금 변형시키고 장난을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도 없고,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죽었고, 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도 죽음 앞에서는 쪽도 못썼습니다. 그밖에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나 그 어떤 유명한 과학자나 정치가나 사상가나 영웅호걸이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는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 억눌려 있으실 수 없었던 주님은 사망 권세,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사망의 권세,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전에도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소녀야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소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며 잔잔하라고 말씀하시자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모든 사건들은 그 분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어둠의 권세, 악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 모두가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승리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인류 최대의 적인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 우리에게 어떤 승리인들 못 가져다주겠습니까?

여러분, 눅11:21,22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앞의 강한 자는 사탄입니다. 뒤의 더 강한 자는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인류의 범죄이후에 마치 사탄이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 육신과 물질과 시간과 능력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며 제멋대로 사용하도록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능력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사탄이 제멋대로 사용하던 것들을 빼앗아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우리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삶으로 원위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시험과 유혹이 오든지 고난이나 핍박이나 가난이나 어려움이나 그 밖에 그 어떤 어둠의 권세가 대들든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8:35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그런 것들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지킴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장 강한 자를 이기신 예수님, 그래서 완전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신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물리치신 예수님,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물질이 부족해도, 혹시 육신이 좀 건강치 못해도 혹시 자녀가 뭔가 좀 문제에 직면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원망 불평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그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 모든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평 불만 원망 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분명히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 안에 분명히 생명의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소망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 아닙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망과 위로과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능력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866년 글래스고우 대학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적인 활동을 한 데이빗 리빙스턴 목사님께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학위를 받기 위하여 강단으로 나오는 리빙스턴 선교사는 갖은 고초로 겉모양은 수척 할대로 수척해져 있었고, 사자에게 물린 왼팔은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선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감사와 기쁨으로 힘 있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지낸 세월을 희생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그저 조금이나마 갚으려 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미력하나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저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걸 어찌 희생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맹수와 질병과 혹독한 기후와 야만인 가운데서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갈 것입니다. 거기가 내 삶의 자리이고 거기에 내 인생의 보람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헌신하다가 60세의 나이에 아프리카의 한 오지의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쁨과 보람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백한 대로 부활의 주님을 믿었고 그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로 그리고 주님앞에 설 날에 대한 소망으로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에게는 분명 이런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16:2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염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볼 것이다. 즉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기쁨을 찾을 것이요, 그 기쁨은 그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제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승리를 주셨습니다. 죄로부터 건져주시고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환경 모든 여건 속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과 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위로 가우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런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어둠과 모든 약한 것들과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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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같은 가정 만드는 법 30가지 

 

1.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
2. 웃는 얼굴을 하라. 웃는 얼굴은 소망성취의 열쇠다.
3. 한 시간 일찍 일어나라. 부지런함이 절반의 복을 끌어온다.
4. 작은 배려에도 고맙다는 말을 하라. 기쁨충만 행복충만이 보장된다.
5. 정감있는 목소리로 말하라. 거친 소리는 쓰지말라.

6. 좋은 말만 써라. 상처주는 말은 하지말라.
7. 희망만을 말하라. 희망의 나무에만 희망의 꽃이 핀다.
8. 유머를 사용하라. 즐거운 분위기가 기쁨을 증폭시킨다.
9. 조금만 잘해도 크게 칭찬하라. 칭찬을 주고 받는 가정에 사랑이 꽃 핀다.
10. 아파트관리비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관리비도 책정하라.

11. 쉬지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신과의 직통전화다.
12. 즐겁게 식사하라. 음식은 생명을 기르는 신의 선물이다.
13. 보약보다 중요한 것은 소식이다. 소식에 앞장 서라.
14.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그래야 위함을 받는다.
15. 걱정하지 말라. 걱정할 일이 있으면 기뻐할 일도 있다.

16. 하루하루 향상하라. 그날이 그날이면 승산없는 삶이다.
17.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라.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이 샘솟는다.
18. 좋았던 일만 기록하라. 미래를 성공으로 이끄는 경전이 된다.
19. 잘못은 곧바로 사과하라. 사과를 잘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20. 낭비되는 시간을 찾아내라. 그것만으로도 삶의 시간이 풍요해진다.

21. 돌다리만 두드리지 말라. 좋은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라.
22. 가족을 즐겁게 하도록 노력하라. 혈연적인 가족만 가족은 아니다.
23. 기념일은 잊지말라. 기념일은 소중한 날이다.
24. 장난으로 한 약속이라도 약속은 꼭 지켜라. 약속은 하늘의 명령이다.
25. 세상을 밝게 보라. 아름다운 내일이 꿈처럼 펼쳐진다.

26.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말라. 화를 내면 화가 닥친다.
27. 좋은 글을 열심히 읽어라. 하늘이 특별히 사랑한다.
28. 보다 나은 방법은 하늘의 별만큼 많다. 그 방법을 찾아내라.
29. 흘러간 세월은 돌이킬 수 없다. 어제에 집착말고 내일을 설계하라.
30. 그냥 자지 말라. 소망이 성취되었음을 마음에 그리면서 잠을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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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활주일 설교] 부활은 우리의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집필자 서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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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주일오전예배 대표기도문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삶의 자리에서 눈동자처럼 보호하여 주시고  

거룩한 주일,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시니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 더위가 남아 있지만,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귀뚜라미 소리로 인하여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면서, ​가을을 준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를 주시고,

하루 하루 삶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풍성한 성령의 열매들을 거둘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였지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죄에 빠져 세상에서 방황하며,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졌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매 순간마다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시고,

죄에 대한 영적인 민감함을 잃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 앞에 머리 숙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어려운 시험과 환란에 처한 교우들을 살피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올려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시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도록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발사로 비롯된,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와

국제정세의 불확실한 상황들을 하루 속히 정리하여 주시고,

​전쟁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지켜 주옵소서.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담대함과 용기를 그리고 지혜와 판단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가,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사오니,

우리의 주인 되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온전히 지켜 주시옵소서.

이 땅에 다시는 6.25 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된 것은 

그 곳에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소돔성과 같이 의로운 사람10명이 없어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깨워주시고

잘못을 회개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

이번 일을 계기로 남과 북이 서로 신뢰하며 평화적 통일을 모색할 수 있도록

양측의 지도자들에게 냉철한 지혜와 명철을 주시고

평화의 마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는 서윤석 목사님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고, 

선포하시는 말씀에 권세를 더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는,  

영혼이 새로워지고 새 힘을 얻는 복된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찬양대’가 준비한 찬양을 기뻐 받아주시고

찬양대원들에게는 찬양이 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교역자님들과 장로님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맡겨진 사명과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강건함과 지혜와 명철’을 주옵소서.

각 기관과 지체들이 제 몫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 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교회학교에서 가르침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교사들과

여러 모양으로 헌신하는 봉사자들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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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대표기도문 (Sunday worship prayer)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무더위로부터 육체의 건강과 마음의 평강을 지켜주시고, 

주일 아침,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다스려 주셔서 주님께만 집중하고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고 위협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으로, 권력으로 혹은 명예로 우리들의 마음을 유혹하거나, 위축되게도 합니다.

주님! 우리를 유혹하고 때로는 낙담케 하는 세상의 풍속에서 벗어나,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길을 따라가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삶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다음 세대의 영적 재무장을 위하여 마련한 여름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특별한 시간들이 되게 하옵소서.

좋은 일기를 허락하시고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마쳐질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교회학교와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써서,

​이 땅의 각 교회들마다 다음 세대가 부흥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여러 형편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며 온 힘을 다하여 살아왔지만,

​견고한 여리고 성과 같은 장애물 앞에서 우리들의 노력은 부질없었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들의 노력을 멈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합니다. 

신발을 벗고, 빈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선 우리들에게

​주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제 본격적인 여름 휴가가 시작됩니다.

산과 강과 바다, 자연과 만남을 통해서 삶의 활력을 재충전하게 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먼 길을 오가는 동안 피곤치 않게 하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옵소서. 

안식년을 맞아 휴가 중인 위임목사님과 함께 해 주셔서

​충분한 쉼을 통하여 재충전의 시간이 되게 하시고 영육간에 강건함을 회복하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시는 목사님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강단에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깨우치는 살아 생명력 있는 말씀이 되게 하시고,

성도들에게는 말씀을 따라 삶이 변화를 결단하고 영육이 새로워지는

은혜 충만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

‘할렐루야 찬양대’가 정성껏 준비한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찬양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찬양대원들 모두에게 감사와 평강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교회를 섬기는 부교역자님들과 장로님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맡겨진 사명과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명철’을 더하여 주옵소서.

각 기관과 지체들이 제 몫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 주시고,  

주님을 바라보며 여러 모양으로 헌신하는 봉사자들에게도

​주님의 따뜻한 위로가 있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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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하나님의 일꾼

 

찬송 :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441장(통 49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출애굽기 35:30∼36:1

성막건축의 명령을 받고 모세는 드디어 성막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일에는 전문가들이지만 성전 건축에 필요한 정교한 기술들을 배운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일을 맡기고 싶어도 적임자를 찾지 못할 때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떤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특별히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브살렐은 수석공인으로, 오홀리압은 브살렐의 협력자로 세웁니다. 모세가 비록 탁월한 인물이고 아론으로 그를 돕도록 붙여주셨지만 성막을 건축하는 일에 하나님은 따로 두 사람을 부르시고 모세의 지도를 받게 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일꾼들을 세우고 격려하고 합심하여 함께 일을 잘 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적재적소에 일꾼들을 배치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리더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재능과 은사를 주셨고 그것을 최대한도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둘째로 두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은 그들을 지혜롭게 하였고 성소를 짓는 모든 일들을 할 줄 알게 하였습니다(36:1). “할 줄 알게 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외부에서 전문가를 불러오시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 가운데 일할 사람을 먼저 뽑고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능력보다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자를 불러서 일을 맡기시기보다 부르신 자들에게 능력을 추가해주셔서 그 일을 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기술과 재능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선물 곧 은사입니다.

셋째로 오홀리압을 협력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힘 있는 유다지파의 명문가문에서 브살렐을 세우고 타 지파에 비해 비교적 약한 단 지파의 오홀리압을 부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아래 또한 많은 지혜로운 자들을 세워서 다양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교회 일은 이처럼 모든 성도들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일이 부족함이 없고 넉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중생으로의 부르심이고 또 하나는 일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교회가 일꾼이 없어 할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시고 능력과 지혜로 충만케 하심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 계획과 능력으로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일할 때 지치지 않고 선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성막을 세우는 일에 부름 받은 가정이요 교회로 서로 협력하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하늘로부터 오는 각양 은사로 무장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일꾼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수환 목사(서울 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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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성령을 따르라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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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 지혜로운 자


•찬송 364장 (통 482장)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2)


•성경 야고보서 3:1~3: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내용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 8).”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하는 성도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2절).” 한 마디의 말이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며,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역시 한 마디의 말이 멀쩡한 기분을 망칠 수도 있고, 더 심하게는 실망과 낙심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10절)”라는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기에 힘쓰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덧붙이거나 의욕에 넘쳐 잘못된 해석을 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그 무언가에 충실하고 의욕이 지나치면 왜곡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니 말입니다.

둘째, 기도와 겸손 가운데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지만 그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철저한 겸손으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내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온전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 4: 11).”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특히 말로써 가르치는 사람은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지혜로운 전달자로서 하나님의 역사에 귀중히 쓰임을 받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마주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명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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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예배설교 <구원의 문>

 

제목 : 구원의 문

말씀 : 마7:13,14

1.구원의 문과 멸망의 문

여러분,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몇가지 서로 반대 되는 개념들을 대비시켜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6절에서는 거룩한 것과 개, 진주와 돼지를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고, 11절에서는 악한 자와 하나님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오늘 본문 13,14절에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17절에서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대비시키고, 21절에서는 말로만 주여주여 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또 24절 이후에서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신 이유는 뭡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선과 악을 대비시킴으로서 선과 악의 결과를 극명하게 알려줌으로써 어떠한 경우라도 선을 선택하여 생명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좋은 것만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으면 선과 악이 선명하게 들어나서 선이 얼마나 좋은지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만 모여 있으면 되게 착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있으면 착한 것과 악한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 이건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지만 키가 큰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키가 크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키가 큰 사람은 훨씬 더 커 보이고, 작은 사람은 훨씬 더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키크고 덩치큰 우리 정호섭형제 옆에는 최대한 안 가려고 합니다. 가면 제가 더 작아 보이고, 왜소해 보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과 악의 심각한 결과를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기 위하여 종종 선과 악을 대비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오늘 말씀은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러분, 보십시오. 세상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는데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 실감이 나시나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얼마나 극과 극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니 얼마나 복되고 소망이 뒤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문입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문입니까?

만약 실감이 잘 안나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이 아름다운 동산에 꽃이 만발하고 새들이 노래하고 잔잔한 시냇가가 있고 온갖 과일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지금 여러분이 지금 독사가 우굴 거리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고, 유황불이 타오르고, 흉악한 강도떼들이 득실거리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때리고 찌르고 죽이려고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엄청난 공포가 엄습하겠습니까? 이러면 좀 실감이 나시나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생명과 멸망은 그 정도는 이유도 아닙니다. 생명의 길은 더럽고 추하고 무섭고 아프고 죽고 하는 것들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과 영광과 은혜와 평안만이 가득한 천국입니다. 반대로 멸망의 길은 생명의 기쁨과 영광과 은혜와 평안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오직 어둠과 불안과 더러움과 아픔과 저주만이 세세토록 계속되는 지옥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말 그대로 극과 극의 길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무슨 일 있어도 절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하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멸망의 길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원한 고통의 나라가 반드시 있고 다른 중간지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열심히 착하게 살다 죽으면 다 좋은데 갈 거라고 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간의 무지의 소치요, 착각일 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길은 영생과 영벌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 속에 엉뚱한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결코 거기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어떻게 말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기서도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다가 마침내 영생복락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구원의 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왜 좁습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전 세계,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딱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즉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예수님 단 한분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데 그것도 내 마음 내 생각대로 믿으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을 예수님뿐만 아니라 공자나 맹자나 석가나 그 밖에 다른 성인군자나 위대한 영웅이나 혹은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선행을 통해서 갈 수 있다면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까 넓은 문이 되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만 믿어 내 마음대로 믿는다면 그래도 넓은 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요1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행4: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보십시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로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속된 표현을 좀 쓰자면 빼도 박도 못하게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여기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생복락 자체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저렇게 착하게 사는데 설마 예수님 안 믿는다고 지옥에야 가겠어? 저런 종교는 다 건전하고 좋은 것 가르치는 종교인데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 좋은 곳에 가지 않을까?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아무 종교나 좋고 건전한 종교를 믿으면 다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굳이 종교생활 안해도 정말 착하고 의롭게 살면 좋은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생각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특별히 천주교는 이런 종교다원주의를 사실상 거의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월초파일에 절에다가 ‘축석탄’하면서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성당 문 앞에 현수막을 걸어놓기도 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다른 길이 있다고 하면서 무슨 예수님을 믿는 겁니까? 성경이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다른 구원자도 있다고 하면서 무슨 기독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상들은 깨트려 버리라고 하셨는데 우상도 잘 섬기면 예수님 믿는 거나 진배없다고 하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갖 헛소리를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마귀는 온갖 핍박과 조롱으로 우리를 무너트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 길로 감으로 마치 그게 진리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게 대세를 이루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왜곡된 대세를 따라서 비 진리의 길,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거기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누가 어떻게 헛소리를 하고, 대세가 어떻게 흘러가고, 세상의 가치관이 어떻게 왜곡되어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택하고 그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영원힌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죄된 육신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그 길이 협착한 두 번째 이유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죄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세상의 즐거움만 찾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설령 찾으려고 해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죄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오직 세상의 돈과 명예와 즐거움을 찾으며 그냥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뭔가 진리의 길을 찾으려고 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죄와 무지와 아집과 이성과 경험을 고집하기 때문에 진리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최고인줄 알고,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그것만 찾아다니니까 하나님께 대하여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관심이 있기는 있는데 여전히 자기 생각과 고집과 경험과 이성을 버리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니까 생명의 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천국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는 완전히 다른데 세상 원리로 천국을 찾고자 하니 어떻게 찾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이유는 천국이 협소하다거나 천국으로 가는 길 자체가 본래 좁다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이유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천국가기보바 쉬운 길이 없습니다. 천국은 원하기만 한다면 아무나 다 들어갈 수 있는 넓고도 확실한 길입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데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대학 나오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자격증 없어도 됩니다. 무슨 토플이나 토익이나 텝스나 이런 시험 안쳐도 됩니다. 키가 작고 못나도 괜찮습니다. 장애가 있든지 병이 있든지 관계없습니다. 돈 빽 권세 지식 명예 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문이요, 제일 넓은 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길이 좁은 이유는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들이 죽자 사자 죄로 어두워진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즐거움과 육신의 기쁨만을 바라보고 그것만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고 그것을 얻고 가꾸는 일에 인생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빠진 육신의 생각과 이성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려고 하니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지도 않고, 거추장스러워 보이고 귀찮게 여겨지고 간섭하는 것 같고 통제하는 것 같으니까 좁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안가니까 더욱더 좁은 문, 좁은 길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애석하게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너무나 좋고 영광스러운 천국이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저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 즐거움을 준다고 하면 좋다고 난리를 칩니다. 육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준다고 하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경제를 살리고 병을 고쳐주고 재미있게 해주면 인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주겠다고 하면 시큰둥하고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언제가 가장 인기가 좋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줄 때 였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배부르게 해 주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하며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생과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시자 그렇게 구름떼처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6:66절을 보십시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 때부터가 언제입니까? 그 앞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요6:55)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그랬더니 달라는 떡은 안주고 무슨 쓸데없는 말이냐며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냥 도망가 버린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서자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부자되고 형통하고 병 낫고 재미있는 이야기하면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이야기하면 싫어하고, 천국에 대해서 말해도 시큰둥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평안히 잘 먹고 잘 살면 대단하게 여기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상급받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어떻게 생명을 살려서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은총은 물로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너무나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 그냥 내 육신의 소욕대로 마음가는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편하게 여겨집니다. 반대로 주님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간섭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면 싫어합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그냥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마음가는대로 하십시오. 편하게 사십시오. 그러면 좋아하고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삶은 어떤 삶입니까? 마음대로 본능대로 살아가면 그건 결국 동물적인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뭐 그래도 동물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육신의 소욕의 지배를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내가 보기에 편한 길, 가기 쉬운 길,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길,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롬8:13절에서는 그래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순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오늘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고 저와 여러분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인기가 없어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쉬운 길, 편한 길, 내 마음대로 가는 길, 육신의 만족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생명의 길도, 진정한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길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생명의 길로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 생명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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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설교] 성결한 교회


제목 : 성결한 교회

말씀 : 행 2:1~13

여러분도 어느 정도 기억을 하고 계실 줄 압니다만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비틀즈'라는 영국의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사람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도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비틀즈를 향하여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만약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사람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다시 비틀즈를 보면서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이 없는 속된 음악을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이것은 낭비이고, 죄악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며 흥분해서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음악교수가 한 행동이 잘 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 그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그러한 행동속에서 한가지 배워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혼을 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음악교수는 음악을 상업화하고, 음악에 세속적인 때를 묻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음악에 정말 자신의 진실을 담고, 자신의 마음을 담고, 자신의 영혼까지 담아서 그래서 음악과 자신과 진실로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고, 비틀즈라는 이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며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혼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악기와 능숙한 기술로 훌륭한 연주를 한다해도 혼이 담겨있지 않은 음악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거기에 진실이 없다면 그 웅변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감동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능적으로,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거기서 무언가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무언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진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이고, 왠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또 한동안은 바둑에 심취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둑은 한 5급쯤 두는데 바둑도 혼을 담아 둘때와 그렇지 못할때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여러분, 사진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진은 저 아름다운 대 자연을 그대로 담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정교하게 찍어낼 수가 있고, 현란한 꽃의 아름다운 색깔들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그려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사진만큼 정교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꽃이나 자연을 사진만큼 그대로 베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그림만큼 값이 나가지를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다고해도 사진에는 혼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비록 사진만큼 정교하지도 못하고 자연의 색깔을 완벽하게 그려낼수는 없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혼이 들어가있기에 몇천만원 아니 몇억원 몇십억원씩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이것은 비단 음악이나 그림이나 글씨 등의 예술작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우리의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감동시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설령 봉사를 한다고 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거기에 영혼이 실려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쩌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녹전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녹전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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