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  명철을 얻으라고

 

 


제목 : 높임받는 삶을 위하여

말씀 : 잠4:1-9

오늘도 계속되는 지혜의 말씀. 다시금 지혜의 필요성, 그 결과를 강조. 계속되는 지혜의 초청.

어떻게 보면 정말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강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또 이야기. 어쩌면 이미 다 말씀해 왔던 부분들, 그런데 또 강조.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잔소리라도 하듯 계속 반복하고 있는가? 물론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만큼 좋은 것이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인생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오늘 7절에서도 말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 지니라.” 여러분, 제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말그대로 제일이다. 제일이라는 것은 첫째를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제일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제일, 그야말로 최상급이다. 최상급은 최고로 좋은 것이다. 그 위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게 제일이다, 저게 제일이다하지만 사실은 제일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제일이라는 것은 지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지혜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지혜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건강보다도 지혜가 더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혜를 제일로 생각하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제일로 생각하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최고의 지혜로 여기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가? 그래야한다. 실제로 그렇다. 지혜가 제일이다. 하나님이 제일이다. 그 안에 있는 은혜가 제일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과 동행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므로 7절에서는 다시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얻은 것, 그러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것을 다 바쳐서라도 다 투자해서라도 지혜를 소유하라는 것이다. 이유는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지혜가 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그러니까 천국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천국을 돈주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사들여야 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 이유야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는 사람은 설령 천하를 얻는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안에 생명의 길이 있고, 세상에서도 축복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다 팔아서라도 이 생명안에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그 무엇보다도 이 지혜를 최고로 여기라. 그리고 그것을 얻으라. 그것을 위하여 투자하라. 그렇다면 이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미 얻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더 큰 지혜를 소유하며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점을 말씀하고 있다.

1.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1절)

1절에 보면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훈계를 들으며, 또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했을 때 「듣는다」는 것은 그냥 귀로만 듣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듣는다는 말은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귀로는 듣고, 마음에는 새기고, 그 마음에 새긴바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듣는다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말에도 말을 잘 들어라하면 그냥 귀로 듣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잘 들어라하면 귀로 잘 듣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인 것이다.

또 「주의하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물론 먼저 「귀를 기울이다, 경청하다, 청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청종이란 말은 말그대로 듣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역시 우리말에도 주의하라 그러면 그냥 조심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올바른 길로 가라는 말인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우선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마음에 새긴을 것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선은 귀로 주의해서 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마음에 새기든지 말든지 할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냥 듣기만 하면 무얼하는가? 마음에 새기기만 하면 무얼 하는가? 마음에 새겨 졌으면 이제는 그것을 따라 살아가야지.

그러므로 우선을 귀로 들어야한다.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자. 새기고 따라가자. 귀로 듣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 하라. 예배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 그러면 참 지혜자가 된다. 은혜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어야 한다.(1,5)

1절에서는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하였고, 5절에서는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7절에서는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얻는다는 말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무엇인가를 획득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투자해서 혹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으라는 그런 말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투자가 필요하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투자가 필요하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도 투자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 보다 더 귀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어찌 투자가 필요하지 않으랴!

요즘 사람들이 노력없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미련한 일이다. 진짜배기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냥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없는 것이다. 설령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공짜로 얻어지는 그 순간 사실을 별로 가치가 없어지고 만다. 그냥은 잘 얻어지지도 않거니와 설령 얻는다해도 그것도 다 무의미하다. 무가치하다.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것에도 투자가 필요하다. 노력이 필요하다. 애씀이 필요하다. 그래서 5절에서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열심히 해서, 무엇인가를 바쳐서 그래서 값진 보물을 소유하라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던 예수님의 밭에 감추인 보화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투자하자. 은혜로운 삶을 위하여 투자하자. 구원의 은총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놀고 먹고 있어도 천국의 은혜를 주신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구원의 은총을 값없이 주셨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값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이다.

그러므로 그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그 구원의 은총을 받았은즉 더욱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그 나라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그리고 나자신의 은혜 충만한 삶을 위하여 그리하자.

3.지혜를 잊어버리거나 버리지 말라.(5,6절)

5절에 보면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고 하였고, 6절에서는 “지혜를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5절에서 잊지 말라고 했을 때 잊지말라는 말은 「잊다, 모르다, 무시하다, 시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겼으면 이제는 그것을 늘 묵상하고 적용함으로써 그 말씀들을 잊거나 무시하거나 희미해지거나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들이 언제나 선명하게 남아서 그래서 그 말씀들이 살아있어서 그 말씀들을 따라 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았는가? 우리의 삶의 현장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살때가 얼마나 많은가? 일상생활속에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고 교회에 와서야 예수님 생각하고, 말씀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나?

또 심지어는 6절에서는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5절에서는 고의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무관심하니까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것이므로 잊는 것도 문제긴 문제지만 버린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버린다는 것은 고의적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 그럴까? 아마도 나의 삶속에서 무언가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그렇지 않을까? 일상생활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했다간 무언가 손해가 올 것 같으면 짐짓 모르는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적 가치관과 물질을 따라 가는 그런 모습은 없었을까?

그러나 이것도 미련한 일이다. 결국은 손해보는 일이다. 설령 물질적인 면에서 혹은 정신적인 면에서 좀 남는 장사를 했다해도 결국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속에서 말씀을 잊거나 더더구나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자. 오직 우직하게 말씀을 따르자. 그러면 반드시 은혜가 오고 기쁨이 온다.

4.지혜를 사랑하라.(6,8)

6절에 보면 “그를 사랑하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그를 품으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그란 지혜를 말한다. 그러니까 지혜를 사랑하여 그것을 마음속에 꼭 품고 다니라는 것이다. 마치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사랑에 빠지면 그 마음속에 온통 그 사랑하는 대상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그를 사랑하고 그를 마음에 품으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성경에서 사랑은 자신을 강요하여 그 사랑하는 대상으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랑에 완전히 붙잡히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강요하면서 그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하여 애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차서 자나 깨나 주님을 생각하며 앉으나 서나 예수님으로 우리의 가슴에 가득차 있는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자신을 강요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5.지혜를 높이라(8)

오늘 8절에보니까 그 곧 지혜를 높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높이라는 말씀은 「둑을 쌓아 올리다. 찬양하다. 값을 비싸게 매기다. 존중하다.」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혹은 말씀에게 적용시켜 보면 지혜를 높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알 수 있다.

그러니까 먼저는 지혜를 높이높이 쌓아올리라는 것이다. 말씀을 사모해서, 말씀을 존중해서 그래서 자꾸만 말씀을 접하면서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자꾸만 쌓아올리는 것, 그것이 말씀을 높이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음에는 물론 말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찬양한다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을 높이고 칭찬하고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하나님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위대한 것이 없으니 최상의 찬양을 돌려야 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다음에 값을 높이 비싸게 매기라는 말을 의미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가장 높게 평가하라는 뜻이다. 이것도 역시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보다 더 높게 평가할 것이 세상에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는 정말 하나님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가? 그렇다면 그 말에 순종하는가? 가장 높은데, 가장 옳은데, 가장 훌륭한데 왜 따르지 않는가?

존중하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들으라는 것이다. 좇으라는 것이다. 그가 최고니까, 그가 선이니까, 그가 생명이니까 그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가 최고다. 그가 제일이다. 그가 선이다. 그가 진리다. 그가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라. 제일로 여기라. 정말 그렇게 여기라. 그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청종하라. 그의 법을 잊어 버리지 말라. 버리질랑 더더구나 말라.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지혜를 얻으라.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얻으라.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랑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다른 어떤 것을 가슴에 품는 것보다도 주님을 가슴에 품고 살라.

그러면 정녕 살게 된다. 진짜 사는 것 같이 산다.(4) 그가 지키신다.(6절)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동행하신다. 인도하신다. 그리하면 영화롭게 한다.(8) 결코 궁색하게 만들지 않는다. 결코 힘들어 지치고 고단하고 슬프게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관을 머리에 두신다.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신다.(9)

우리 온 성도들은 진실로 지혜를 사랑하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이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란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청년부헌신예배] 진리의 파수꾼이 되라

 

 

 

제목 : 청년들이여, 진리의 파수꾼이 되라.

말씀 : 요일 2:12-17

어느 서양의 시인은 “젊은이를 나에게 보여다오. 나는 그 나라의 앞날을 점치리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곧 그 나라의 미래이기에 젊은이를 보면 그 나라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젊은이가 참된 진리안에서, 올바른 이상안에서 맑은 눈동자를 지니고, 뜨거운 정열에 불타고, 냉철한 이성과 근면 성실한 손을 갖게 될 때에 만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는 소망이 있고 밝은 미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청소년들이 타락의 도를 더해가고 있다는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좀 지나간 통계입니다만 지난 95년 4월에 법무부가 발표한 최근 5년간 소년 범죄 동향 파악 자료에 의하면 강도나 강도 살인, 강도 강간 등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 중 10대의 소년이 전체의 54.3%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매년 증가 일로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현재의 10대 후반부터 30대 전후의 청소년들을 우리 기성 세대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식적으로는 그들이 기성 세대들에 비하면 월등하게 우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엄청난 지식을 심어주기는 했지만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은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편하고 약삭빠르게 돈 잘벌고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가르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니 그런 세대가 남을 생각할리가 없습니다. 일하기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저 남의 등을 쳐먹든지, 사기를 치든지, 남을 밟고 일어서든지, 쉽게 돈벌어서 잘먹고 잘살면 그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의 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와 네가 함께 잘살수 있는 길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청소년기의 특징은 지극히 정열적이면서 지식에 대한 많은 욕구를 갖고 있으며 또한 매우 이성적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증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면 한사코 수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하여도 수학이나 과학의 문제처럼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년부, 아동부에서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어린이들이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에 올라갈수록 많은 수가 탈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일이 있으니 그것은 곧 우리의 그 알량한 지혜나 경험으로는 하나님을 헤아려 알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들이 몇 개인지 세어 보려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은 한계가 있고 미약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5-6)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마치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져보려고 하고, 증명해 보려고 하고, 미신을 섬기듯 엉뚱하게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족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진정한 삶의 지혜와 능력을 덧 입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수 있습니까?

2.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면 무엇보다도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말씀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인생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둡고 왜곡된 세상속에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와 교회 안에서도 젊은이들이 무기력한 이유는 그들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고, 세상의 지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고 하였습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된다.”(딤후3:17)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사모할때에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고,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둘 때에 올바른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늘 변합니다. 욕망이 끝이 없습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로 계속해서 부정부패 척결을 그렇게도 강조하고 그것을 퇴치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애를 썼건만 오늘 우리 사회속에는 곳곳에서 부정과 부패로 썩는 냄새가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우리나라가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마져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은, 진실로 우리가 함께 마음놓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우리안에 온전히 거하게 하는 길 뿐입니다. 더구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아직 분별력이 약하고,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니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범죄율이 적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쉐마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에서 능력있게 지혜롭게 돈 잘벌고 잘먹고 잘 살수 있는 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생의 지혜와 선악을 분별하는 말씀 교육을 먼저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평생 떠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차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인생의 등불인 말씀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안에 거할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을 벗어 날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3.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은 악한 것이므로 세상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상종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과 반대되며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거기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대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철저하게 대적을 받았습니다. 물론 세상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는 범죄한 인류를 조종하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떠나서 쾌락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육신의 감각적인 것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도록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면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을 매력있게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갖 향락의 문화가 청소년 꾀어 내고 있습니다. 마귀는 심지어는 우리가 보기에는 건전한 운동이나 예술이나 오락을 통해서도 우리들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온통 그것들에게 빼앗기게 함으로써 교묘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지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했습니다. 왜 이겠습니까?

먼저는 세상이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속에서 일어나는 죄악된 욕심입니다. 육신에 대한 탐욕, 사치, 쾌락, 성욕, 물욕등 하나님을 잊게 하고 이웃을 생각지 않게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 다음에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보는 것마다 갖고 싶고, 누리고 싶고, 먹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계속해서 강도를 높여가기 때문에 여기에 걸려들면 헤어 날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생의 자랑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고 자기자랑, 자식 자랑, 남편 자랑 등을 통하여 은근히 자기 자신이 높임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두번째 이유는 세상의 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세상이 아무리 매혹적이요, 수지맞는 것 같아도 거기에 소망을 두면 실망합니다. 세상의 새것은 곧 낡아집니다. 젊음도 곧 사라집니다. 아무리 값비싼 금은보화나 대궐같은 집도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흙먼지보다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봤다고 스스로 말할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누려보고 가져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월이지나자 그 모든 것은 빛 바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은 이와같이 안개와도 같이 바람과도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도, 영광도, 명예도, 쾌락도 다 지나가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은 자요, 영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의 자본은 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짧은 과거와 긴 미래를 가진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제한 미래는 암울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그의 영원한 미래는 말할것도 없으려니와 현실속에서도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인생이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많은 지식을 얻는다 해도, 설령 많은 부귀를 차지한다해도, 설령 큰 명예를 얻는다해도 그것들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질수는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벧전1:24-25)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넓은 바다에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지식과 정보와 문화가 산더미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하지 않으면 세상이라고 하는 파도에 밀려 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는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만약 당신들이 세상이라고 하는 파도속에 침몰되어 버릴때에 당신들은 물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안에서 진리를 지키고, 여러분들이 참된 인생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할 때 우리 사회는 붕괴 되어지고 말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험한 세상에서 당신들 자신을 스스로 자신을 지킬 때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이 혼돈된 세상속에서, 이 가치관이 상실되어 가는 사회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찬으로서, 진리의 파수꾼의 역할을 다할 때입니다. 그것이 당신들 자신을 살리는 길이며, 내 가정과 이웃과 교회와 이 사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가정예배] 행함이 있는 믿음 

 

 

 

•찬송 220장 (통 278장)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성경 야고보서 2:14~2: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내용

신앙생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생활을 해야 하며 생활 속에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가식이며 죽은 믿음이라는 따끔한 지적입니다(17절). 그러면서 가식적인 믿음이 어떻게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며 날카롭게 반문합니다.

신앙생활은 첫째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싶고,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사랑에는 실천이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양식을 공급해야 하고 낙심한 자에게는 위로를 해줘야 하며,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가난에 처해있는 성도들을 앞에 두고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16절)”이라고 말만 하는 것의 문제를 짚어주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사례입니다. 곤경에 처한 성도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에 몸과 마음을 보탤 수 있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축복받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같이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이 순전한 신앙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절대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21절). 이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라합은 생명을 걸고 순종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순종이었습니다(25절). 하나님은 이와 같이 행동하는 믿음을 원하시고 찾으십니다. 나아가 이와 같이 실천하는 믿음 위에 은혜를 주시며 축복해주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눅 6 : 38).” 사랑의 실천에 주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행함이 믿음의 열매가 되게 하시고 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고난주간 절기예배설교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낮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학교 / 교사헌신 예배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별하여 불러 주시고 귀한 직분을 맡겨 주셔서 어린 생명들을 주님의 귀한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도록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니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할 뿐이옵니다. 주일 저녁을 맞이하여 이 밤에 저희 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더욱 큰 헌신을 다짐하는 헌신 예배로 드리오니 주님 홀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지난날을 돌이켜 보건대 저희들은 세속과 육신에 관계된 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주님이 맡겨주신 귀한 직분과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했던 게으르고 무익한 교사들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어떤 때는 이 귀한 직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희들이 감히 이 자리에 나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헌신예배를 드린다고 하니 양심이 찔려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나 이다. 오 주여! 지난날의 죄악들은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도말 하여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새로운 다짐을 갖고 충성할 수 있기를 소원 하오니 연약한 저희들을 도와 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저희들에게 맡겨주신 어린양 떼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보살피게 하옵시며 어린 생명들이 주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저희들이 되지 않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어린 심령들에게 언제나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교사들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옵소서. 혹 부지 중에라도 보여진 저희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말미암아 어린 생명들이 상처 받고 낙심할 수도 있사오니 언제나 주님 앞에서 산다는 저희들의 신앙 의식이 흐트러지지 않게 도와 주시옵시고 먼저 우리 자신을 주의 말씀으로 잘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특별히 영혼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교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맡겨진 영혼들을 한 영혼이라도 곁길로 나가지 않도록 잘 살필 수 있는 교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간구 하옵기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고자 힘쓰고 애쓰는 주의 종들이 있나이다. 성령께서 위로하여 주시고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항상 기쁨이 넘쳐 나는 삶이 되게 하시고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고 인정하시는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지도 전도사님을 위시하여 지도부장, 지도 교사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이 맡기신 어린 생명들을 잘 양육할 수 있게 하시고, 부흥하는 주일학교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 머리 숙인 모든 성도들도 영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온 성도들이 혼연 일치가 되어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들고 단위에 서시는 강사 목사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들어 주셔서 목사님의 선포 하시는 말씀을 통해 모든 교사들이 영적으로 재 충전하고 더욱 사명에 충실한 교사들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순서를 맡은 분들에게도 함께 하셔서 성령의 인도함을 밭게 하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 하오며 어린 생명들을 천국의 주인공으로 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설교 부활의 진리와 부활의 기쁨

 

 


  성경 ; 시118:14-25, 고전15:1-11, 요20:1-18
  제목 ;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할렐루야,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에
게 언제나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와 여
러분이 부활의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닫고 확실하게 믿음으로써,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주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이다(고전15:14)’라고 했습니다. 바울
은 다시금 강조하기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
들도 망했을 것이다(고전15:17)’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만일 기독교
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피
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고전15:19)’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
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믿을 경우, 믿음생활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지 아니 믿는지 알 수가 없는, 그처럼
흐릿하고 불분명한 신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확
실한 믿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신앙은 살아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는 날이 갈수록 썩어문드러지
지만, 살아있는 나무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성장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
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그 생활하는 모습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밝은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지금 사는
것이 많이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
수께서는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을 승
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기어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는 ‘두 손이 없는 소금장수, 강경환 씨의
장엄한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
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한 포대씩 놓여 있곤 했다는 것입니다. 13년째나 계속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지난해에 그 주인공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강경환 씨입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두 손이 없는 그가 염전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람이 남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두 손을 잃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해변에서 깡통
하나를 발견해서 갖고 놀다가 돌로 그 깡통을 두드려댔는데, 그 순간 그 깡통
이 터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깡통은 6․25 동란 때에 묻어놓은 대인지뢰였습
니다. 이때, 그는 그만 두 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 보기가 부끄러워서 중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그
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먹여주고, 소변까지 뉘
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외갓집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그가 스스로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소변보는 일도
스스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힘들어서 농약 먹을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
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주막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집에 왔는데, 책상에 유인물이 하나 있
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걸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인물에는 팔 둘과 다
리 하나가 없는 ‘정근자’라는 사람이 교회에서 간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
니다.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 간증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절반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람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 정근자 씨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답장이 즉시 왔습니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강경환 씨는 기자에게 “나에게 손이 있었다면, 나는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근자 씨로부터 편지를 받은 이후, 술을 끊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
니다. 삽질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면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다니던 교회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염전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피눈물
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짓는 삽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큰 삽을 두 손
없이 사용해야 했습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서, 그는 하루 2시간만 잠을
잤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을 잃어버
린 대신에 얻게 된 귀중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랑을 직접 이웃에게 실
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금 한 포대에 만 원을 받으면, 거기서
1000원을 떼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금을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록도에도 해마다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냈다고 합니
다.
    그는 2001년에 시청에 자발적으로 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는 또한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고 하
면서, 한 달에 6만원씩 받는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염전이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의 실천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사춘기 때에 손을 잃어버리고 청년시절까지 방황하다가 얻게 된 그 소중한 믿
음이 그로 하여금 계속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하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강경환 씨는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그는 손만 잃
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살았으
나 죽은 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근자 씨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
를 믿게 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삶을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는지요? 진정
부활의 진리를 바로 잘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두
손이 없는 강경환 씨보다는 좀 더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그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쓸모없는 우리 인생을 존귀케 하
시려고 부활신앙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우
리는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1.부활의 진리를 잘 깨닫고 그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 이하에서 ‘나는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는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
릴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
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덕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
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아
니라, 그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난 후에, 그는 부활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 편에서 볼 때에, 바울은 과거에 아무 쓸모가 없는 정도가 아니
라, 복음전도의 방해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후에
는, 복음전도의 방해자가 아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새 인생을 살았던 것
입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
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만방
에 떨쳤던 아주 유명한 황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방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세오졸프’
라는 사람을 체포해서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서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했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
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
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그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던 루이 14세
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의 왕' 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멈추게 한 후에 감옥으로 들어가서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석방해서 자
유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 15절에서, 시인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집집마다에서 들려
오는 저 소리, 기뻐서 소리 지르는 저 환호성을 들어보아라. 여호와께서 힘쓰
시어 엄청난 일, 곧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
에서 ‘여호와께서 이루신 이 일, 그저 놀랍기만 하여라. 이 날은 여호와께서 승
리를 안겨주신 날, 다같이 기뻐하며 함께 잔치 벌이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를 경우, 새로
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우리 모두 부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이 묻히신 무
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빈 무덤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에
예수님이 입으셨던 고운 베옷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
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
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주님을 모셔갔는데, 그분
을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 등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
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느냐?”마리아가 예수님께 “당신이 그분을 옮겨가셨다면 어디다 모셨는지 알
려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도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얼떨결에 주님을 붙잡고 “선생님!”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
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이제 너는 내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올라
간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했습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께
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그를 살려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인간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
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곧, 죽게 될 사람이 어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습
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집에서 살게 된다 할지라도 죽음
을 앞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진정 평안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
렇게나 살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
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면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오후설교] 내가 네 가운데 거하리라 

 

 


제목 : 내가 네 가운데 거하리라

말씀 : 슥2:10-13

여러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큰맘 먹고 세차하면 꼭 비가 온다. 고장 난 전자제품이 서비스맨이 당도하면 정상으로 작동한다. 차가 막힐 때 옆 차선이 빠른 것 같아 차선을 바꾸면 내 차선이 막힌다. 급하게 택시를 기다리면 꼭 반대편에서 빈택시가 온다. 운전 중 기름이 다 떨어져 갈 때 꼭 반대편에서 주유소가 나타난다. 이런 경험 들 말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사실은 내 마음의 문제다. 주유소나 차가 막히는 것이나 세차하는 거나 택시가 오고 버스가 오는 것은 늘 본래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어떤 상황에 따라 주변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내 마음이 무엇인가 조급해하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활에서 그렇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믿음 생활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 나의 상황이나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조급해 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조용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될 것이 없다.

Ⅰ.스가랴서의 내용(지난 시간)

스가랴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 1-8장까지는 B.C.520년 경(다리오왕 2년 8월, 학개 다리오왕 2년 6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학개 선지지와 함께 성전건축을 독려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후반부인 9-14장까지는 그보다 약40년 뒤인 B.C. 480년경에 씌여졌다. 이때는 성전이 건축되고 몇십년이 지났음에도 유다의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이 실망하고 있었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는 머잖아 열방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결국 유다를 구속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1.성전건축의 독려와 격려(1~8장)

1)회개의 촉구(1:1~6)

2)성전건축을 위한 격려(1:7~6:15)

3)올바른 신앙생활의 촉구(7:1~8:23)

2.열방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9~14장)

1)열방의 심판(9:1~8)

2)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한 예언(9:9~14:21)

*묵상

①성전을 건축하라. 그러면 복이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②그러나 구체적인 복이 임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분명히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이방은 심판받는다. 유다는 구원받는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다.

1.성전 건축의 독려와 격려(1~8장)

1)회개의 촉구(1:1~6)

(슥1: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훈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돌아오라. 주님의 역사를 위한 일을 미루지 말라. 성전이 삶의 중심이 되게하라.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라.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자.

2)성전건축을 위한 격려(1:7~6:15) - 9가지 환상

①말과 말 탄 자에 대한 환상(1:1~7)

(슥1: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슥1: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슥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교훈

하나님의 순찰 ①독려, 감찰, 감시 ②격려, 위로, 평안, 안도, 승리, 확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순찰하신다.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건설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라.

②뿔과 공장에 대한 환상(1:18~21)

(슥1:18,19)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슥1:20,21)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교훈

때로는 악인을 들어 의인을 연단시키시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오직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진정한 승자가 된다. 세상의 뿔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뿔을 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잠시잠깐의 고난이나 패배한 것 같은 상황이라도 낙심치 말고 주를 바라보라.

*예화 - 똥밖에 없어

어떤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어떤 집 문 앞에 도착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빨리 먹어? 뭘 꾸물거려?”

“가만히 있어봐. 똥 밖에 없어!”

“뭐, 똥밖에 없다고, 그럼 그거라도 먹어야지 어쩔거야!”

“글쎄 좀 생각해보고.... 똥을 먹어야되나 말아야 되나!”

“아, 똥 밖에 없다면서? 그럼, 그거라도 먹어야지 어떡해?”

“알았어, 그럼 먹을 게, 에이, 좋다 먹자!”

“자, 먹었어. 이제 당신 먹어!”

“그래, 알았어, 나도 먹는다고 좀 기다려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둑은 오죽 하면 똥밖에 먹을 게 없을까하고 오히려 자기 주머니를 털어 만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 몇장을 문 밖에 놔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속의 똥은 화투장의 똥을 말하는 것인데 도둑은 배설물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하도 불쌍해서 물건을 훔치려다가 오히려 자기 돈을 주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의도대로 잘 따라가야 한다.

③척량줄을 잡은 자에 대한 환상(2:1~13)

(슥2:1,2)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손에 잡았기로 /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때에 (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교훈

결국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 때로는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재고 계신다. 하나님이 건설하고 계신다. 우리의 할 일은 그저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뿐이다.

④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3:1-10)

(슥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교훈

하나님께서는 그을린 부지깽이라도 싹이 돋고 움이 나게 하신다. 초라하고 볼품없어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 그 역사는 물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더 이상 부지깽이 같은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그 역사를 이루어가야 할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낮예배설교] 지혜로운 인생

 

 


제목 : 지혜로운 인생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

[주일낮예배설교]  잘못된 신앙관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잘못된 신앙관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itworldkorea

IT korea가 세상(world)을 변화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