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예배기도] 사순절주일낮예배 대표기도문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부족한 저희들을 너는 내 것이라 부르셔서

주님의 한없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시니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활의 큰 기쁨과 영광을 저희들에게 주시기위해서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통에 동참하고 참회하는

고백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갱신하고 잘라내야 할 부분을

잘라내게 하시고 끊어 버려야 할 부분을 끊어 버리고 깎이고 다듬어져서

주님의 모습으로 성화되는 결단의 절기가 되게 하여 주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신 주님!

저희의 허물을 주의 보혈로 덮으시고 용서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해방시키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좌절하고 포기한 삶에 삶의 소망과 기쁨과

감사한 참된 삶의 의미를 주시는 생명이심을 확신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로 세우신 우리교회가 십자가의 사랑과

참 생명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요즘 환경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지만

저희는 어떤 일이든 말씀 충만함과 믿음의 기도로 감사와

찬양으로 잘 극복하게 하옵소서.

 

성도들이 올 한 해 하늘 문을 열어가는 가정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고

병마로, 경제문제로 자녀문제로, 직장문제로 어려움 있는 가정마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간구하여 응답받는 사순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고통 받는 이웃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부요케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긴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의 각 기관마다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활기찬 기관이 되게 하여 주시고 모든 기관마다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선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고 늘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저희들 삶이 되게 하여 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기를 거부하지 않고 피 땀 흘려 기도하시며

순종 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저희들도 주님 앞에 순종하는 심령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선우교회를 기억하셔서 병마로 고통 중에 있는 성도에게 주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치유의 손길과 회복의 능력을 체험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저희에게는 기쁨과 사랑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충만케 하옵소서.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아버지!

이 나라와 민족의 고난을 돌아보시기를 기도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늪에 잠겨있는 이 시대에 세상의 방법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 나라 이 민족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과 평안으로 새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교회 목사님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생명력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성도들의 심령에 옥토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렵고 힘든 생활 가운데서도 주님 말씀으로 잘 감당하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섬기며 살게 하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각 부서에서 수고하며 섬기는

성도들을 기억 하시고, 맡은바 직책과 직분을 겸손함과 기쁨으로

감당할 때마다 성령님의 크신 위로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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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우리의 하나님

 
 90장 (통 98장) 찬송듣기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성경 미가 7:18~7:20 성경감추기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내용  
많은 신앙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제각기 자신의 신앙대로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가르침을 주시는 '좋은 훈장님'으로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무엇이든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제공하시는 '요술램프'쯤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죄와 관련해 항상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하시며 옳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엄한 판사' 같은 분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경외심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 자비와 사랑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이미지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물으시지만 죄로 인하여 인생 전체를 망치거나 죄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 은혜 가운데 인간을 머물게 하시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유력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탐심과 권력남용, 그리고 우상숭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의 '사유와 인애'를 동시에 선포합니다. 그분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온전히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는 심판을 부르는 매서운 회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하는 '자리'로 작용합니다. 인간의 결점과 허물, 죄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어줍니다.

기도  
주님, 죄에 얽매이지 않게 하소서. 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깊이 체험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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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주님과 동행


말씀 : 요20:19~21

제목 : 주님과 동행

1.매순간 부활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주일은 지난 주일만이 부활주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부활주일이고 다음 주일도 부활주일이고 매주일 아니 매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난 주일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가운데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이 매일 매순간 함께하며 힘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니까 이천여년전의 그때만 아니라 또 매년 돌아오는 부활절 뿐 아니라 우리는 매순간 부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주일 하루만 주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다. 와! 대단하시다. 이런 구호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 부활의 주님이 내 삶을 지배함으로 매일 매순간 부활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 그냥 그 옛날 이천여년전에 부활하신 주님으로 끝나버린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역사적 사실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성, 경험, 과학, 지식, 논리를 초월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세주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인정한 다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지금 나와함께 계신 부활의 주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그 은혜와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인정은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나팔은 불기 전까지는 나팔이 아니며,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걸 따라가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려면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하고 사랑하며 경배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이 온전히 내 심령속에 거하게 됨으로 자연히 부활의 주님의 그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충만하게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20:38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심령속에 모신 사람은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여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이시며 그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사람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함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는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내 심령의 왕좌에 모셔 들이고 그 주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늘 주님과 가까이 대화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통치자, 나의 주권자, 나의 인도자로 온전히 인정하고 그 부활의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저와 여러분은 진정 살아있는 자로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주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어떤 능력이 임하게 됩니까?

2.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면 우리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의 모든 어두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 즉 마귀 사탄, 어둠의 권세, 무덤의 권세,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에 보면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 있던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요20: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눅23:27절에 보겠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마27:56절이나 막15:40에 보면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그 모진 고문과 멸시천대와 채찍질을 당하시고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피를 흘리며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고통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27:61절에 보면 아리마대 부자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지내 드릴 때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3시였는데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 여섯시 장례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 세 시간동안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고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내려 무덤까지 모시고 가서 몸을 씻겨 드리고 향품을 바르는 등 모든 절차를 제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장례는 서둘러 대강대강 진행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던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 모진 고통과 멸시천대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만도 너무나 마음이 아픈데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다가 안식일이 끝난 첫새벽에 부랴부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의 무덤가를 찾은 마리아는 또다시 좌절감에 빠집니다. 어떻게 향품이라도 한번 발라드리려고 잠도 못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건만 이번에는 그마나 그 시신마져 없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그나마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하여 향품이라도 어떻게든 발라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시신마져 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슬픔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20: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랍오니’하고 대답합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오 주님, 주님 맞습니까? 오,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시네요. 이런 이런 정말 주님이시네요.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군요. 오 주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살아계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슬픔에 잠겨있었으니.. 오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의 슬픔은 단번 싹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61:3 상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이런 은총이 주어집니다.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십니다. 근심대신 찬송을 주십니다. 절망 대신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망권세, 어둠 권세 모두 이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도 남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혹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근심과 염려가 있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찾아오셔서 마리아야! 조목사야, 김장로야, 이권사야! 박집사야! 아무개야! 하면서 불러주십니다. 그러면 그 한마디면 끝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염려 슬픔 다 물러갑니다. 아무개야! 걱정말아라. 슬퍼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잖니? 내가 너를 도우마. 내가 네게 힘을 주마. 내가 너를 건져주마하시며 다가오셔서 우리로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절망속에 빠져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 모든 근심 걱정 슬픔 절말 한방에 싹 물리쳐 주신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갈 때에 그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다 이기고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1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와, 우리 선생님 대단하시다. 와, 우리가 이 굉장하신 분의 제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와, 이런 분이라면 우리가 목숨을 바쳐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했던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병정들에게 당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그들은 그만 겁에 질려 모두 도망가 버렸고, 죽어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고향으로 돌아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군중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니 도망가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저들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문을 잠겨져 있는데 예수님이 불쑥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무슨 말씀입니까? 왜 두려워 하느냐? 보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보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다시 살아났느니라. 나는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너희가 힘을 주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를 만져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려움과 절망 속에 꽁꽁 묶여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묶고 있던 두려움이 끈이 풀린 것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주님,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그토록 의지했던 주님을 잃고 실의와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찾아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고 좌절과 슬픔속에 빠져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을, 근심 대신 찬송을 주셨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실의와 좌절과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처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세상의 두려움과 약함과 핍박을 이기고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슬픔 두려움 절망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다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께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평강이 나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6:3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노라면 때로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대적자들의 도전으로 환난을 당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면 너희 또한 세상을 이길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약함과 추함과 죄와 어둠과 지옥과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전에 부활하셔서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부활의 주님과 늘 가까이서 교제하며 대화하며 의지하며 신뢰하며 믿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더럽고 추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이기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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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제목 :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말씀 :아모스 8:11-1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니라 (아모스 8:11)

우리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풍요로워졌지만 내면적으로는 주리고 갈하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와 결핍을 느끼며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주의 말씀뿐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는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인도하는 나침반입니다.

삶의 방향을 알면 불안하지도, 공허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실패하거나 넘어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본능과 죄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성경 말씀대로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위로와 만지심도 맛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리고 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양식을 삼아도 문제입니다.

말씀은 지식이나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세포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나를 살게 하도록 말씀은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 지성업 목사 대전산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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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향한 말씀] 무소유자도 소유자도 죽은 후에는....


무소유자도 소유자도 죽은 후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의 형체에게 생명의 호흡인 영을 불어 넣으셨을 때 인간은 흙도 어떤 영도 아닌 새로운 존재인 살아있는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호흡”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원재료인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게 된다.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이 말씀대로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려올라간 에녹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죽지 않고 변화되어 휴거될 사람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할 뿐 그 누구도 한번 태어나면 결국은 한번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

 
며칠 전 절에서 일평생 대부분을 중으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함과 함께 한없이 높이며 그의 삶을 칭송하고 있는데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언론들은 그가 평생을 소박하고 청렴결백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격찬해마지 않는다.

“평생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했던 법정 스님이 오늘(11일) 입적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종교를 초월해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폐암으로 투병해 오던 법정 스님이 오늘 오후 2시 입적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54년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지난 1975년부터 전남 송광사 불일암에서 17년 동안 홀로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자신이 지은 길상사로 옮겨진 직후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언론이 늘어놓은 찬사와 그의 발자취의 일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모두 다 옳고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을 두고 그 말을 되씹으면서 그의 삶을 본받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을 모아 놓은 “어록”에 담긴 내용을 보면 보편적인 상식선에서의 진리는 될지언정 역시 성경의 절대 진리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다. 그는 무소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이 말이 왜 그처럼 대단한 말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살면서 느끼는 상식적인 얘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무소유라는 말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써먹고 있을 뿐이지만, 성경은 무소유랍시고 결혼을 금하여 가족도 없고, 모든 물질을 소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어 풍성하게 가지게 될 것이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리라. 너희는 그 쓸모없는 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마 25:29,30).
 

다만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설령 네가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며 설령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육신에 고통이 있게 되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또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것같이 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같이 하며 또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은 것같이 하라. 그리고 이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다 이용하지 못할 것처럼 하라. 이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감이라』(고전 7:28~31).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 갚지 않은 병원비를 남들이 갚아 주어야만 했다. 무소유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무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도 식대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물질을 충분히 확보했고 죽은 후에 남에게 뒤치다꺼리를 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던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나는 너희가 보낸 것을 에파프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하게 되었노라. 이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요,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빌 4:18).

 
또한 그는 마음을 비울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과는 정반대의 말로 사람들을 미혹해 왔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물소리 바람소리' 중)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의 상태는 마귀의 영향 아래 있기에 악령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비워두면 마귀가 그 자리를 점유하게 되고 그 사람은 악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단장되었더라. 그러자 그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려와서 들어가 거기서 사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악화되었더라』   

(눅 11:24~26).

 
마지막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질문에서도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에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만일에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일평생을 시간을 허비하며 살다가 죽는다면 그가 갔던 곳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자연인으로서 자연인들에게 올바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그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해놓고 답변은 주지 못했던 소크라테스와 같이 정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따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과 사망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막연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죽음은 영과 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몸은 누구라도 죽으면 무덤, 즉 흙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도다』(전 3:20).

『모든 육체는 함께 멸망하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욥 34:15).

 
그러나 영과 혼은 비물질이기에 결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므로 가는 곳이 육체가 가는 무덤이 아니다. 사람의 호흡이 멈추면 영은 그 몸에서 빠져나와 그것(생명의 호흡)을 주셨던 하나님께 회수되고 혼 역시 구원 여부에 따라서 지옥이나 낙원으로 가게 된다.

 
『그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죽음에 관한 어떤 말에도 점수를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입적(入寂)이라는 불교용어를 쓰는데, 그것은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다.”라는 뜻을 지녔으며, 바로 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들은 다양한데 열반(涅槃))은 도를 완전히 깨우치고 모든 중고와 번뇌가 끊어진 해탈의 경지에 들었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적멸(寂滅), 귀적(歸寂) 입멸(入滅) 등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불타오르는 듯한 고뇌, 번뇌의 불을 꺼버리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달음을 완성한 단계로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견해를 앞세워 죽음을 미화하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노력을 해도 죄인은 죽어서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라는 사실은 결 코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죽으면 무소유자든지 소유자든지 지옥 아니면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시 9:17).

박재권 / 캐나다 주재 기자    
출처 : 바이블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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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생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말씀 : 벧후 1:1-11

올림픽 경기 제밋게 보고 보시나요?   지난시간 우리들도 올림픽 선수들처럼 인생을 경주 선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핑검사에 걸려 출전 정지를 당하고 메달을 탔어도 박탈되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뜻하신 법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는 심판 날에 주님의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의 뜻이 뭣이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에서 틀어지면 모래위에 탑 쌓은 것 같이 잘못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기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믿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여러분 나름대로 인생이란 뭣과 같은 것이라며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사람들일지라도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남들처럼 사는 거지 인생이 별거냐 하면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는 시간임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이미 갓난아이란 출발지를 떠나 여기까지를 달려왔다. 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야들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란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생이란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배가 항해를 떠나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고 시합이 시작되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정한 시간이 오면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출발이 있고 골인지점이 있고 마감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인류전체에게 ‘스톱, 이젠 끝났다. 지금부터는 심판의 시간이다.’라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최후 심판은 엄정하고 공평해서 천국과 지옥을 나누며 천국 갈 자중에서도 상급이 다르며, 지옥 갈 자중에서도 형벌이 다를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들라면 히브리서 9장 27절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꼭 알아야 할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놨습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했는가? 그 이유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였다고 창세기 1장에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2장에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의 한계를 말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첫 인류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하고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법을 어겼을 때 어떻게 되었지요? 첫째 범법자가 되어 버렸고 범법자에게 따르는 죄악의 값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맛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을 싸우고 있고, 병들고 늙고  약해져 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하나님과는 단절되고 죄악을 다스리는 자 악한 마귀가 그 인생을 장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고 계속 죄를 지면 악한 마귀와 함께 영영 지옥 불에 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에게는 죄를 없이 해주시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행복했던 에덴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니 그보다 더 귀한 자리를 주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에서는 죄 범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는 올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가인은 자기 맘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은총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그 마음을 장악한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만 되는 지를 말하고 있으며, 6장에서는 홍수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노아에게는 심판에서 피할 길이 있음과 비록 하나님의 아들들일지라고 자기들 보기에 좋다고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치도 않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0장은 세계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 를 보여 주고 있고 11장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나라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고 있고 12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아브라함이란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출애급기부터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과 세상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인류의 마지막은 어떻게 마감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구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해야만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려고 창조했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을 하신 뒤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과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우리 사람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모든 인류들이 저지른 죄- 그 죄란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섬기지도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제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신 형벌의 죽음이란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죄를 면제 받으며 원래 신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려고 창조했던 신분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되고 믿어야 되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목적과 마귀 때문에 죄에 빠져 범법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을 알아야 만이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뭣인지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하나님아버지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어떤 것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6장 40절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아버지의 뜻은 예수가 누군지를 알고 믿어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영생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육신만이 전부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불행한 사람들이요 안타까운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법을 어기면 얼마나 불행에 빠지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를 받고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신분이 회복이 되었으니 이제는 예수님 말씀대로 법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요? )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만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에서 영광된 자가 되며 기업을 얻을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하나만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서 복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8가지 심령의 상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장은 비유를 말씀한다고 해서 비유-장이라고 하는데 어떤 자들이 천국에서 복된 자들임을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장 25장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영광의 자리를 얻을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가르친 것대로 살면 주님께서 함께 할 것이고 주님께서 오셔서 시작할 나라, 하나님나라에서 복된 자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지 땅에서 세상에서 잘되고 영광을 누리고 형통한 자가 된다고 하신 구절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신약 성경의 서신 서를 통해 우리 육신이 사는 것은 다가올 하나님나라, 영생의 나라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하는 기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이고’ 세상에서 부와 귀와 공명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잘못된 가르침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주시려는 복과 예수님이 오신 신약 시대의 복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법도들을 지키며 땅에서 그들에게 복 주시겠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신 약속인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와 약속한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들에게 하신 약속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자들에게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나라에서 천사들이 부러워할 복, 시들거나 쇠하지도 않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서 하나님나라 기업을 주시되 열 고을도 다섯 고을도 주시고 예수님과 같이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하시되 우리 안에 계시며 보혜사가 되셔서 어떤 일에도 평안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요한복음 14장 26에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고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함께 할 것이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전천후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먼저 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했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은사들을 주시며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렴이  없도록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교회들과 하신 약속이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은 땅에서는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떤 핍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시는 심령의 복을 주시고, 예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이 계획한 엄청난 하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할 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왕과 백성과의 약속이라고 하고, 교회와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는 약속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여러분의 왕이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운다고 할 때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도 그걸 모르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 육신적인 복, 세상 적인 복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왜 세상에 왔는지 왜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 때 번영주의, 기복주의 미국교회 영향을 받고 예수 믿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잘못되게 가르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너도 나도 예수님을 잘 되겠다고 하는 믿음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땅의 복을 구한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서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처럼 핍박 받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주님께서 자신 안에 성령님으로 함께 하심을 알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사함으로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죄의 탕감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함께 살며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엄청난 복을 받았다면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헌신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삶은 선수들이 장래에 메달을 바라보고 노력하듯이 영원히 사는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집중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이란 경주를 하는 삶과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을 받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임을 알고 피할 줄 알고 달려야 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이런 사단의 방해 공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서 정신 차려야 할 땝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성경을 읽으시되 특히 말세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많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예배에 생활에 더욱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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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말씀] 신앙의 블루오션

신앙의 블루오션 / 황규현목사님

민수기 14:1~10

[백성의 원망]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예전에 블루오션이라는 책이 큰 히트를 친 책이 있습니다. 수많은 경쟁자가 있는 레드 오션이라 한다면 경쟁자가 없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이런 논리를 가진 블루오션이라는 개척에 대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블루오션의 핵심은 차별화입니다. 보통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모두가 다 한곳만 바라보고 일등을 향해서 모두가 바라보는데 모든사람이 다 같이 일등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모두가 다 목표점이 다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사람들이 뛴다고 같이 뛰지말고 너희 나름의 밀알이 되어 하나님의 분깃대로 살아라 라는 것입닌다.
이세상에서 말하는 차별화된 블루오션이 신앙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남이 보지 않고 하지않는 신앙의 블루오션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첫째) 상황을 넘어서야 합니다.  출애굽한 민족이 정탐꾼을 보내어 보고 온 것을 듣는데 이들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왔지만 이들은 아주 상반된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른 의견은 열지파의 대표인 것입니다. 우리는 메뚜기같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지파의 사람은 상황만 보았지만 여호수와와 갈렙은 상황을 넘어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상황에만 급급하여 요동치는 모습들이 아니라 상황에서 넘어선 상황을 볼 줄 아는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상황은 바뀔지언정.... 말씀이 본질이 되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보이는 (둘째) 상황을 넘어선 상황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돠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혼돈과 고난만이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상황을 뛰어넘는 신앙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 40년 후의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를 보니  지금이 절망적이지 않고 활기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 지향적인 부름을 받았습니다. 천국가는 그날까지 ....천국이 그런곳이며.. 천국이 그런 곳이고 가려한다면 현재만 보지않고 먼 미래를 보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는 과거에 매이지도 않았고 현재에 안주하지도 않았고 먼 미래를 바라보며 달려가라 말합니다.
 이 열지파는 오직 사람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사람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는 계속해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만 보면 불가능한 땅이지만 하나님만 보면 불가능한 땅은 없고 가능한 땅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여 내 판단을 하는 경우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은 믿는자를 통해서 (세째) 하나님만을 믿으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자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도 바다 위의 배도 아무리 튼튼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결코 낙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삶을 살게 된느 것입니다.

라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여정에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푯대를 세워서 나아가는 끝까지 승리하는 그런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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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산다는 것 

사무엘상 19장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When David had fled and made his escape, he went to Samuel at Ramah and told him all that Saul had done to him. Then he and Samuel went to Naioth and stayed there.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Word came to Saul: "David is in Naioth at Ramah";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so he sent men to capture him. But when they saw a group of prophets prophesying, with Samuel standing there as their leader, the Spirit of God came upon Saul's men and they also prophesied.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Saul was told about it, and he sent more men, and they prophesied too. Saul sent men a third time, and they also prophesied.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Finally, he himself left for Ramah and went to the great cistern at Secu. And he asked, "Where are Samuel and David?" "Over in Naioth at Ramah," they said.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So Saul went to Naioth at Ramah. But the Spirit of God came even upon him, and he walked along prophesying until he came to Naioth.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He stripped off his robes and also prophesied in Samuel's presence. He lay that way all that day and night. This is why people say, "Is Saul also among the proph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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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가 섞인 교회 - 故 옥한흠 목사   

 

마태복음13장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Jesus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an who sowed good seed in his field.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But while everyone was sleeping, his enemy came and sowed weeds among the wheat, and went away.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When the wheat sprouted and formed heads, then the weeds also appeared.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The owner's servants came to him and said, 'Sir, didn't you sow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then did the weeds come from?'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An enemy did this,' he replied. "The servants asked him, 'Do you want us to go and pull them up?'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No,' he answered, 'because while you are pulling the weeds, you may root up the wheat with them.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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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 : 요한복음 14장 27절


다수의 현대인이 걸려 있는 병은 불안입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새롭게 밝혀지는 질병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전쟁을 불안해하며, 잘 먹고 싶은 사람은 먹을 것을 염려합니다. 과거에 비해 모든 것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한 불안과 염려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인류는 이러한 불안을 퇴치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정치인들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내려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물리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려고 힘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의 노력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새로운 질병과 새로운 전쟁, 새로운 기근을 양산해 버립니다. 왜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이 만들어질까요. 왜 사람들은 만족하고 살 수 없을까요. 이 부조리한 세상에 무엇이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평화(평안, 샬롬)가 주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땅과 인류의 삶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질서이시고, 하나님만이 완전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그 평화의 왕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왕으로 모신 이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의 평안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평안이요,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이의 평안이며, 미래의 일을 다 알고 계신 분의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시회안전망 구축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취업률을 높여 누구나 일하면서 자기 행복을 꿈꾸게 하면 범죄율도 낮아지고 자살률도 낮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해 교회들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세상의 지식과 삶의 방식을 불어넣으면 악이 다 제거돼 보다 나은 사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죄를 저지른 인간에게서 선한 구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기가 갖고 있지 않는 것에 욕심을 냅니다. 탐내는 것이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사람들 마음에 들어와 탐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랑이나 화해, 용납과 세워줌의 미덕을 찾을 수 없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고안해낸 제도나 권력이나 재력 같은 힘으로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성탄절을 맞으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 자기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주님을 영접함으로 세상이 주지 못한 평화를 간직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심권호 부평 일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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